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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용의 첫 장편 연재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90년대 중후반 특유의 대중문화에 대한 진지한 비평을 시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만화의 미학적 성취와 표현력의 모범사례처럼 적극적으로 다뤄진 바 있다. 조금 더 만화에 대한 오랜 관심을 가져온 이들은 그가 [만화광장]을 거치며 선보인 여러 실험적 단편들을 끄집어내며, 주류적 장르물 생산 방식의 틀에 묶이지 않고 작가주의를 지켜왔다는 측면에 주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적 개성이란 틀의 여부보다는 자신의 일관된 주제의식, 그것을 더욱 적절하게 나타내기 위한 절묘한 이야기의 제시, 그리고 그 이야기를 위한 적극적인 표현방식에 있을 따름이다. 박흥용이라는 작가에게 있어서 일관된 주제의식이란 구속과 자유, 사람 사는 세상의 원죄와 구원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이야기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여행길이다. 그리고 표현 방식은 가장 기본적인 장면전환기법에서 초현실적인 화면요소 병렬까지, 한계를 모르고 그 순간 가장 강력한 무언가를 자유롭게 취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만화적인 구도의 여정, 그것이 바로 박흥용 만화를 압축하는 키워드라고 할 만하다.
[만화광장] 1986년 신인공모전 당선작 [백지]로 대표되는 초기 단편들은 밑바닥 인생에 대한 드라마틱한 접근은 아니지만 평범하게 비루한 삶을 사는 이들의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곤 했는데, 특히 상황에 담긴 정서를 만화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다양한 형식 실험이 특징적이었다. 그리고는 더 안정적 작업을 위해 장편 작업에 뛰어들었는데, 계몽사 [학습만화 한국사] 같은 역사 만화와 국민일보에 연재한 [검] 같은 선교 만화가 그런 사례였다. 그리고 1995년에 본격적인 장편 장르만화로 연재한 작품이 바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었다. 서자 출신인 주인공 견자가 전설적 맹인 검객의 제자가 되어 여행길을 나서는데, 임진왜란 무렵 여러 사람들의 사연을 스쳐 지나며 누군가를 지키기도 하고, 혁명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 여정 속에서, 견자는 점차 자신을 구속했던 신분이라는 굴레를 초월하며 정신적 성장을 이뤄낸다. 이 작품은 단편 시절부터 지녀온 사회적 시선, 선교 만화를 거치며 다듬은 구속과 자유와 구원에 대한 내적 고민의 전개 능력, 그리고 역사만화를 통해 구축한 능숙한 긴 이야기의 호흡이 한데 어우러졌다. 정지된 순간과 역동적 동세를 동시에 화면에 구성해 넣는 섬세한 표현력, 그리고 심상 속 기왓장을 밟고 허공을 건너오는 장면 같이 시각적 비유를 고스란히 현실과 섞어 넣는 우아함이 두각을 나타냈다. 여기에 마치 마당극을 연상시키는 구수한 해학과 여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명작이 완성되었다.
차기작인 [경복궁 학교]와 [내파란 세이버]에는 직접적으로 여정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구속과 자유에 대한 주제의식은 여전히 가득 담겨있었다(나아가 박흥용 만화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륜 구동에 대한 애정도 유독 두드러진다). 무너진 건물 안에 갖힌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작품인 [경복궁 학교]는 오토바이 택배 노동자를 통해서 속도를 통한 자유를, 만화가 지망생의 사연을 통해 그림의 틀과 파격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간다. 자전거 경주가 유행이었던 어느 시절의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하는 [내파란 세이버] 또한 겉으로는 순박한 시절과 스포츠의 매력을 논하는 듯하면서도, 틈만 나면 개인 신체의 한계와 해방감에 대해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크고 작은 구속에 대해서 건드린다.
유난히 야심찬 스케일이면서도 안타깝게도 연재 초입에 중단된 작품이 바로 [그의 나라]다. 표면적으로는, 수학여행 중이던 한 소년이 갑자기 붕괴되었다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돌팔매 실력 하나로 생존해 나아가야 하는 줄거리다. 하지만 흔한 생존물의 공식을 따라가기 보다는, 사회의 틀이 무너진 시대에 사람들이 식량과 구호물품이 있는 땅을 찾아 나서는 출애굽기의 직접적 비유로 방향을 잡아버린다. 기독교 성서의 틀거리는 세부 사건이나 주제의식에서도 더욱 깊이 들어가서, 생존의 원죄와 구원의 길에 대해 끊임없이 화두를 던진다. 이렇듯 다윗이 창세기를 고찰하며 출애굽기를 하던 와중에, 안타깝게도 박흥용의 성서적 SF는 조기 연재 중단을 맞이하고 말았다.
잡지에서 남긴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작품인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일간지에서 연재되었다. 정교한 컨셉트를 이번에는 비워내고, 한 청년이 혼자 오토바이로 전국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펼쳤다. 당연하다는 듯 그 여행길은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스쳐지나가는 계기고, 특정한 지역 공간, 그 안에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그 후 비슷한 정서의 편안한 중단편 작업이 이어졌다.
그리고 박흥용은 2013년에 다시 묵직한 장편인 [영년]으로 돌아왔는데, 사실상 [그의 나라]의 계승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가상의 파괴 후 세계가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파괴를 시대배경으로 삼았고, 돌팔매 소년이 아니라 돌팔매가 특기인 마을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숨겨둔 쌀이 흐르는 구원의 땅을 찾아 피난을 떠나고, 생존하는 과정 안에서 이미 이기적인 경쟁을 하며 타인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의 나라]에서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나의 삶을 구속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생존이라는 자유를 돕는 것인 공동체,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범주인 국가의 의미를 되묻는다.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갈등 사이에서 서로에게 어떻게 굴어야 하는 것인지, 공동의 목표와 당장의 개인적 어려움을 저울질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지, 하염없이 도전받는 여정이다. 구원의 실마리는, 성서적 신이 아니라, 자유와 구속을 늘 고민하는 우리 인간들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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