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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생. 데뷔작 <해와 달>부터 평단과 독자 양측 모두에게서 숱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기인을 연상시키는 풍모에 다작을 하지도 않으며 출생년도 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남자 이야기>, <푸른 길>, <남한산성>등 걸출한 작품을 내며 특히 뎃생을 비롯한 작화 전반에서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작가다.
어떤 작가의 “색”을 읽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다른 원작을 각색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었을 때 두 가지를 비교해보는 것이다. 독특한 무협물을 그리는 작가로 한국 만화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권가야 작가의 경우, 좌백의 무협소설 <대도오>를 각색한 <남자 이야기>가 가장 적절한 참조 사례가 되어줄만 하다. 무협에서 흔히 등장하는 영웅 방랑기이라기보다는 조직화된 소대원들의 전쟁 참여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편성이라든지, 냉소적이고 실리적인 주인공이라든지, 큰 사건들의 흐름이라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명성이 높던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남자 이야기>의 무대는 한 차례의 인류 멸망 후 인공생명체에 의하여 전근대 문명의 수준으로 관리되는 세상이며, 무협의 통쾌함은 그런 세상에서조차 살고 싸우며 실존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질문으로 바뀐다. 무협의 필수요소인 의협심은, 정의에 대한 도덕적 추구가 아니라 ‘남자’의 근본적인 존재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명제로 대체된다. 표면적으로는 마초적 정서의 쾌감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은 결국 실존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해도 되는 것인가.
작품연보
1995 《아이큐점프》에서 <해와 달>로 데뷔 (전 5권)
1998 《영점프》에서 <남자 이야기> (10권 미완결)
2000 <풍운남아> (전 2권)
2002 <푸른길> (전 5권)
2004 《계간만화》에서 <갈매기의 꿈> (3부작 단편)
2006 <구룡쟁패-철권시대>
2008 <남한산성> (1부 완결, 전 4권)
수상내역
1999 오늘의 우리만화상
1999 출판 만화 대상 저작상
뜬금없이, <해와 달>
권가야의 장편 데뷔작이자 한국 만화사에서 입지를 굳힌 <해와 달>이 1995년에 《아이큐점프》 지면에 선보였을 때 가장 두드러졌던 특징은 “뜬금없음”이었다. 첫 장면이 똥을 누는 말의 항문이라는 파격적 시작도 그렇고, 당시 한국에서 가장 주류 위치에 있는 소년만화 잡지 가운데 하나에서 한창 그 장르의 유행코드였던 선명한 구도의 (다시 말해, <드래곤볼> 방식의) 필살기 격투대전을 거의 완전히 무시한 전개도 그랬다. 그리고 연재가 더 전개되어가며, 승부보다는 내면의 고민을 유사 철학적 논변으로 풀며 이야기의 주제로 삼는 접근법이 또다시 뜬금없었다. 하지만 작품이 완결될 때 즈음 좀 더 선명해진 것은, 그것이 부조리나 의외성을 노렸다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지면과 상관없이 실존이라는 핵심 화두를 강행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에 가까웠다.
주인공 백일홍은 전설적 검객 백비의 남겨진 아들로서, 재능과 훈련으로 탁월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여, 은둔한 상태에서 멍한 성격의 소유자로 살아갈 따름이다. 무협물로서의 줄거리는 여러 세력들이 움직이며 강호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백일홍이 폭풍의 눈으로 대두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끌어가는 진정한 전개는 바로 백일홍이 왜 살아가야 하는가, 왜 싸우고 살생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에 있다. <해와 달>은 일홍이 마침내 강호에 나서자 갑자기 이후에는 각 세력이 어떻게 대결하고 승패가 갈리며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다는 설명을 그냥 마치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듯 자막 처리하고는, 완결되어버린다. 무협활극으로서는 겨우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대목인데, 정작 실존이라는 주제로서는 할 말이 끝나버린 것이다.
<해와 달>, <남자 이야기>, 비슷한 시기의 단행본 작품 <풍운남아>는 모두 실존에 대한 질문을 무협물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녹여내는 접근을 보였다. 무겁고 관념적인데 그렇다고 어떤 사회적 공감대를 부르기도 쉽지 않은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무협 요소를 발판삼아 탁월한 재미를 줄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과 동세를 정밀하게 포착하는 필체와 세밀한 배경 묘사가 액션의 연출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고, 정교한 칸 분할과 배치를 통해 여러 가닥의 사건을 동시에 섞어 넣는 편집연출이 쾌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뚝뚝한 주요 인물들이 당연한 신조인양 말하는 몇 마디의 선 굵은 명제들의 울림이 있다. <남자 이야기>의 한 대목에서 용맹한 장수가 자신의 자결로 부대 전체를 구하면서 지휘관에게 “제 아들에게, 남자란 적극적으로 죽음을 모색해야 할 때가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라고 읊조릴 때 풍기는 마초적 당위성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럼에도 존재를 다짐하는, 무협의 정서
무협의 정서, 즉 죽고 죽이는 싸움 속에서 도의를 고민하는 장르적 틀거리 안에서 작품을 펼칠 때 권가야의 실존에 대한 질문이 무리 없이 전개될 수 있었다. 활발한 내적 사변과 무뚝뚝하지만 묵직한 당위적 발언으로 되묻는 질문들은, 실존을 고스란히 위협받는 가장 절실한 순간에 비로소 관념론적 궤변으로 침몰하지 않고 온전히 울림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스토리작가와 함께 한 연쇄살인마 수사 스릴러 <푸른 길>, 수학 이론을 탐구하는 기인을 그린 <갈매기의 꿈>에는 그런 무협의 정서가 빠져있었고, 밋밋하거나 난해한 결과물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절실함의 정서가 필요할 따름이지, 장르로서의 무협물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권가야 만화의 장점을 다시 온전히 살려낸 작품이 바로 <남한산성>(1부 완결, 2008-2010)인데, 전란의 시기에 어쨌든 살아남고자 터전에서 방어를 하고 버티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왜 존재 하는가”를 질문하는 단계를 넘어서, “그럼에도 존재 하겠다”를 다짐하는 이들이다. 왜구의 능욕으로부터 지켜주겠다며 죽이려는 아비로부터 살아남아 더욱 강하게 버티는 여인부터, 살아남아 다시 싸움터로 가는 의병장, 목숨 걸고 마을을 지키는 장로 등 많은 이들의 사연이 하나로 섞여 들어간다. 비참한 상황이기에 더욱 비장하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실존의 방식을 당위로서 지켜간다. 화려한 싸움 장면 연출 대신, 강렬한 구도와 대담한 선으로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절실함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그림의 세밀함으로 인한 자체적 요인이든 적합한 연재 지면을 맞추기 어렵다는 외적 요인이든, 권가야는 다작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남한산성>으로 건재를 과시했듯, 더욱 우직하게 비장한 재미와 사색을 던져줄 것이 계속 기대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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