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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사에서 발간하는 만화잡지 <아이큐점프>에서 1996년부터 연재한 권가야 작가의 데뷔작이다. 당시 단행본 총 10권 분량으로 연재계획을 세웠지만 연재잡지의 주 구독층의 연령대가 <해와 달>을 열독하기에는 낮은 편이었기에 5권 분량으로 급하게 완결 되었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자 명작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한 작품.

이질적이지 않은, 걸작 무협만화의 탄생

해와 달

<해와 달>, 권가야(글/그림) 박동해(저), 시공사 펴냄, 5권 완결

무협물의 핵심적 매력으로는, 이름 그대로 ‘무예’를 통한 ‘의협’의 실현이 꼽힌다. 그 중 무예 부분은 각종 신묘한 싸움 방법을 고안하고 그려내는 표현적 재미의 영역이다. 그런데 의협 부분은 좀 더 복잡해진다. 분연히 무력으로 나서야할만한 옮음의 추구란 대체 무엇인가. 가족의 원수를 갚는다거나, 양민을 구한다는 간편한 동기도 물론 있다. 하지만 강함을 쫒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누군가에게 충의를 보낸다는 것은 왜 어떤 조건에서 가치가 생기는 것이며, 개인적 사랑과 조직의 보전과 거창한 대의 사이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할 것인가. 정파와 사파를 선악구분으로 놓던 고전적 장르 구도는 “신필” 김용에 의하여 일찌감치 깨졌기에, 협을 어떻게 규정하고 접근하는지가 바로 각 작품이 얼마나 좋은 세계를 만들어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준다. 물론, 그렇게 세워놓은 협의 개념들이 무예로 전달이 되어야만 비로소 무협의 품질이 완성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와 달>은 흔히 일컫듯 이질적 무협물인 것이 아니라, 무협의 기본적 재미를 제대로 구현해내는 작품이다. 물론 작품이 연재되었던 지면과 당대에 유행하던 무협의 코드와 비교할 때 이질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한창 <드래곤볼> 방식의 격투 중심 소년만화 장르코드로 개가를 올리고 있던 90년대 초중반의 잡지 《아이큐점프》에 연재 지면을 두었는데, 정작 쾌활한 캐릭터 해석과 화려한 무예 표현력으로 무장한 당시의 새로운 히트 무협만화들과 결을 달리했다. 난해한 캐릭터와 절제된 모습, 서사에 충실하기보다 뜬금없는 사유와 이미지의 난입(당장 작품의 첫 시작부터, 똥을 누는 동물의 항문 클로즈업이다)으로 가득하다. 연재 지면의 독자들에게 대중적 호응을 얻어내는 것에 실패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이 작품은 ‘무’의 측면도, ‘협’의 측면도 굉장한 내공을 담아내고 있기에, 나중에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전설의 명작처럼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사색적 무협’의 개척

해와 달

<해와 달>의 장면들. 흔히 상상하는 무협만화에서 보기 드문 사색과 연출이 있다.

ⓒ 권가야, SIGONGSA Inc. 2001

줄거리 자체만을 놓고 보면 사실은 굉장히 특이한 구석이 없다. 퇴역 후 은둔하여 폐인으로 지내던 전설의 검객 백비가 죽은 후, 더욱 뛰어난 무예 재능을 지녔지만 사회성이 미숙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그의 아들 백일홍이 세상에 나온다. 그 시기에 맞추어 강호를 불안한 균형 속에서 점하고 있는 여러 문파들이 패권을 향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고수들이 서로 인연과 악연을 쌓아간다. 그런데 <해와 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의협 부분을 아예 형이상학적 사색으로 논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이란 무엇이기에” 정도의 시적 추상성이 아니라, 아예 유사 철학 논변이다. 주인공 백일홍이 기억하는, 자신을 괴롭히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정의는 나의 행위의 자기 정당화에서 모색되어진다. 자기 정당화된 나의 본래성이 곧 나의 정의인 것이다. 세상의 정의는 당위성에 근거한다. 곧 옳음이란 타당성의 요구인 것이다. 일홍아! 나의 고뇌는 타당성에 대립되는 나의 본래성에 있다. 내가 자학하는 것은 타당성의 요구에 대한 내 본래성의 자기 정당화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기 정당화의 실패, 그것은 자학과 모멸과 고뇌인 동시에 몰락이다. 일홍아! 난 몰락한 것이다."

지향할 가치를 잃고 폐인이 된 무인이 스스로를 학대하면서, 아들에게 행패부리며 동시에 무공을 전수하는 생활 속에서 내뱉는 사유다. 뛰어난 철학적 통찰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무력을 휘둘러서 구현할 어떤 정의가 얼마나 치열한 논변을 필요로 하는지 던져놓는 방식만큼은 충분히 굉장하다. 비단 위 발언의 주인공인 백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크거나 작게나 저런 식이다. 어떤 가치관에 부딪힐 때 그것을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고민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가 버린다.

일종의 사색적 무협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무예로 도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문답에 가까운 논변을 펼치는 과정에서 무의 근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삶의 목적, 죽음의 필연성, 재능의 굴레, 아버지와의 갈등의 의미, 그런 아버지의 부재 속에 남은 허무 등 화두로 삼을 소재들은 넘친다. 그 안에서 각자의 정의, 충성에 대한 기이한 논리 등이 펼쳐지고, 그런 형이상학적 고민으로 만들어진 뼈대 위에 비로소 무예가 덧씌워진다. 완전한 답변을 만들어낼 만큼 논변이 엄밀한 것이야 아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깊숙한 사색으로 소화해낸다는 방식 그 자체가 주는 울림이다.

백일홍은 그런 작품의 주인공답게, 모든 인물들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사색한다. 자신과 애정을 나누고 가족을 꾸릴 여인이 한 문파의 자객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여타 작품에서라면 격한 복수심에 이글거리며 길고 처절한 복수극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백일홍은 길고 처절하게 사색한다. 아주 오랫동안 시신의 옆을 떠나지 않고 스스로 거의 시신상태가 되고, 문제의 문파를 찾아가서 수십일 동안 문 앞에서 거지처럼 드러눕는다. 사랑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사색하고, 급기야는 왜 그들을 죽이지 않아야하는지 사색하느라 그렇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결국 떠오르지 않았을 때, 비로소 도륙이 시작된다.

연출로 끌어올린 무공의 강렬한 맛

해와 달

대담한 페이지 사용과 컷 분할로 무공의 강렬함을 전했다

ⓒ 권가야, SIGONGSA Inc. 2001

의협을 질문하고 파고드는 재미와 함께, 무예 부분도 결코 만만치 않다. 당대 유행하던 화려한 박진감과 정반대였을 뿐, 대단한 연출력으로 무공의 강렬함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무예의 종류와 개성 넘치는 고수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여타 작품이라면 드문 기인 취급당할 사고방식의 인물들이, 철학적 사변으로 무장하는 것이 기본인 이 작품에서는 그저 즐비하다. 화려한 몸놀림과 장쾌한 파괴 같은 팬서비스를 뒤로 하고, 고수일수록 그냥 칼과 주먹이 허무하게 스윽 지나간다. 그런 과정을 동세와 정지된 순간이 자유롭게 결합시키며, 여러 상황들을 동시에 촘촘히 교차시키며 전환하는 압도적인 연출력이 특히 장점이다. 일례로 한 격투 신에서는, 백비의 과거 사연과 그 사연을 이야기하는 현재의 무림 고수의 긴장된 상황, 그런 백비를 사모했던 다른 고수가 습격자 무리와 싸우는 대목 등 세 가지 이야기가 급박하게 교차된다. 양면 페이지 양식의 매력을 최대화하는 숨 막히는 칸 연출 시퀀스가 정교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해와 달>은 갑작스러운 결말을 맞이했다. 서사가 막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에 갑자기 끝을 내버린 것이었고, 그 후 재평가 속에서 복간이 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일본에서 등장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의 마지막 두 화가 그랬듯, 주제 상으로는 하고 싶던 말을 다 해놓았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마무리라는 점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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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호 집필자 소개

만화 연구가. 본명 김낙호 및 capcold라는 필명으로 2000년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을 시작으로 「만화의 이해」, 「한국현대만화사」, 「만화가 담아내는 세상」등 다수 만화관련서를 집필 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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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봐야할 명작만화
죽기전에 봐야할 명작만화 | 저자김봉석 외 | cp명에이코믹스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을 명작만화 70편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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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해와 달죽기전에 봐야할 명작만화, 김봉석 외, 에이코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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