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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고선지
高仙芝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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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755년 |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당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으나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 패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에서 토벌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을 지켰다. 그러나 전투 중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 기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의 명장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이다. 당의 서역 원정에 큰 공을 세웠고 동서 교섭에도 많은 흔적을 남겼다. 당의 사진 절도사, 안서 절도사를 지냈다.
고선지의 성은 고구려의 왕성(王姓)인 고씨이다. 이에 따라 그가 고구려 멸망 뒤 당으로 건너간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 사람이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高舍鷄)가 고구려 멸망 이후 중원으로 이주해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했고, 서역의 사진(四鎭)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 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樽)이 고선지의 공을 시기해 ‘개똥 같은 고구려놈’이라고 욕했다는 대목도 실려 있다.
《신당서》에 따르면 고선지의 외모는 무장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용맹한 장수 같다기보다는 말쑥하고 수려한 외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외모처럼 우유부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활을 쏘고 말을 탈 때의 고선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영민했고 도량이 컸다고 한다.
고선지는 스무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가 세운 공으로 인해 유격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를 큰 재목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부몽영찰이 그를 여러 차례 발탁했고 얼마 후 언기 진수사가 되었다.
평범한 그가 장수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741년 무렵이다. 톈산(天山) 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가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북상하자, 고선지가 기병 2,000명을 데리고 토벌에 나서 진압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 전투를 계기로 서역의 군사 요충지인 사진도 지병마사에 올랐다.
6년 뒤 1차 서역 원정 때는 한층 강화된 전투력을 선보였다. 747년 토번(吐蕃,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7~15세기까지 인도 서부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난 이슬람 왕조를 통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진출하려던 당을 견제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이 이에 맞서 싸울 군대를 조직함으로써 고선지는 당시 행영 절도사로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 족의 군사 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했고, 계속 진격해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끊어 양국의 제휴를 단절시킨 이 공로로 고선지는 홍로경 어사중승에 올랐다.
750년에는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타슈켄트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으로 호송했다. 고선지는 2차 서역 원정의 공을 인정받아 751년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포로로 잡혀 온 석국왕이 참살되자 서역 각국과 사라센이 한꺼번에 탈라스(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들은 당이 투르키스탄 서쪽 지역까지 진출한 것에 격앙된 상태였다. 결국 고선지는 정벌군 3만 명을 추려, 이른바 3차 서역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튀르크계인 카를루크 족이 당과의 동맹을 깨고 반란을 일으켜 협공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가 끝난 뒤 당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 절도사로 보내 우우임군 대장군에 임명했다.
755년 현종의 신임을 받던 안녹산이 당나라 국경방비군의 3분의 1가량을 장악하고 난을 일으켰다. 고선지는 즉각 토벌군의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고선지는 안녹산 세력에게 뤄양(洛陽)을 빼앗기고 퇴각하던 당나라 군대를 지원해 전열을 정비했고 반군을 격퇴하여 수도 장안을 지켰다. 하지만 평소 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많았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당현종에게 고선지가 마음대로 주둔지인 산저우(陝州)를 떠나 퉁관(潼關)으로 이동해 피해를 입혔다고 밀고해 진중에서 참형되고 말았다.
비록 그의 최후는 좋지 않았지만 그가 서역 원정에서 보여준 군사 전략은 후대에 높게 평가되었다.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한 영국 탐험가 슈타인(M. A. Stein)은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천재적인 전략가”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또한 서구 사회에서 고선지는 단순한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제지 기술을 이슬람 세계에 전파하여 이슬람 문명과 유럽 문명 부흥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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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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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고선지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윤재운,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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