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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급제, 고난의 가시밭길
조선시대 양반들은 누구나 과거급제를 꿈꾸었다. 과거급제는 개인이 입신양명하는 길이자 부모와 조상들에게 효도하는 길이요, 후손들에게는 양반으로서의 신분을 물려줄 수 있는 길이었다. 한 집안의 자손이자 가장으로서, 또 후손들의 조상으로서 과거길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했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문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린 사람은 1만4600여 명으로 연평균 30여 명에 그쳤다. 좀더 많은 사람을 뽑은 생원·진사시 합격자도 4만7000여 명에 그쳐 한 해 평균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생원·진사는 아주 흔한 듯 보이지만 실은 전국에서 매년 100등 안에 드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만 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관료의 길이 보장되는 문과가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개중에는 이이(李珥)처럼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하여 아홉 번 장원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이도 스물아홉 살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할 때까지 연이어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이이는 별시 초시에서 그 유명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을 했지만 회시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이이에게도 과거급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는 과거를 ‘고난의 가시밭길’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는 윤초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소녀의 증조할아버지다. ‘초시’란 과거의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던 말이다. 문과급제는 물론이거니와 생원·진사도 되지 못하고 그저 초시에 합격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초시어른’이라고 불렀다. 오늘날로 치면 ‘1차 합격 어른’인 셈이니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초시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만큼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남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은 춘향이와 이별하고 상경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문과에 급제했다. 고작해야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이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드문 경우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급제자 가운데 스무 살 이전에 급제한 사람은 기껏해야 300명 정도였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을 보면 생원·진사시는 34.5세, 문과는 36.4세로 모두 서른다섯 전후였다. 조선시대에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일찍 자식을 본 사람이라면 자식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다. 게다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합격자의 연령도 높아져 18세기 후반 문과급제자의 평균 연령은 39.0세나 되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나마 30대 합격은 준수한 편이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합격 연령을 보면 40대 이상의 급제자가 전체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많지는 않으나 70대와 80대 급제자도 있었다. 최고령 합격자는 1861년(철종 12)의 김재봉(金在琫)과 1888년(고종 25)의 박화규(朴和圭)로 모두 90세였다. 두 사람은 구십의 노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급제를 하사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나이까지도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합격 연령 분포는 한편으로 사람들이 몇 살 때까지 과거를 보았는가를 나타낸다. 50대, 60대 급제자의 존재는 이 나이까지도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과거에 응시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노년의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이 함께 과거를 치르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과거에 합격한 이는 전체 응시자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청년 시절부터 연례행사처럼 과거시험장에 출입했으나 끝내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에게 과거는 평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다. 이제는 아들과 손자가 그를 대신하여 과거시험장을 드나들었다.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모든 사람이 과거급제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에 합격하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자질과 실력이 이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 응시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들을 생각하며 과거급제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숙명처럼 주어진 일생의 과업이었다. 그리고 이 과업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다.
18세기의 유명한 문인이자 화가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에 발문을 썼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반평생 넘게 이러한 곤란함을 겪어본 자가 이 그림을 대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질 것이다.
강세황은 1776년(영조 52) 노인들을 위해 특별히 시행한 기로정시(耆老庭試)에서 6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청년 시절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해 급제하기까지 40여 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림을 보고 코끝이 찡해진 이가 비단 강세황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청년 시절 과거시험장에서 맛보았던 좌절과 고초,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합격의 기쁨을 되새기며 추억에 잠겼을 것이다. 끝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이루지 못한 청년 때의 꿈과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되새기며 남몰래 회한의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문양 속에 담은 급제의 꿈
과거 응시는 남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만 과거급제는 온 집안의 꿈이었다. 더욱이 수십 년에 걸쳐 남편과 자식의 과거 응시를 지켜보는 여성에게는 과거 응시가 자신의 일상이며, 과거급제가 그 스스로의 꿈이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과거를 준비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또 시험 때마다 짧으면 열흘, 길게는 달포가 걸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런 일은 거의 매년 반복되었다. 남편과 자식을 과거시험장으로 보낸 여성은 매일 새벽 정한수를 떠놓고 합격과 무사 귀환을 빌었을 것이다.
과거급제에 대한 기대는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젊어서는 남편의 급제를 빌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과 손자의 급제를 빌었다. 나아가 대대손손 이어질 후손들의 급제를 기원했다. 과거급제의 꿈은 한 가정의 꿈이자 대대손손 이어지는 온 집안의 꿈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다양한 물건에 과거급제의 꿈을 담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그림이나 공예품에서 과거급제에 대한 소망을 읽을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평생도다. 평생도는 사대부의 일생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려 병풍으로 제작한 것이다. 대개 돌잔치, 혼례식, 삼일유가, 한림겸수찬 행차, 지방관 부임, 판서 및 정승 행차, 회혼례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때로는 소과 응시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사대부의 일생을 출생과 혼인, 과거급제, 영예로운 관직생활, 장수로 축약한 것이다.
현전하는 평생도는 대부분 그 주인공을 알 수 없으나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1549~1615)과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 1703~1771)처럼 그림 속 주인공의 실명이 전해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평생도와 실제 이력을 비교해보면 평생도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생도는 특정한 주인공의 일생을 그린 기록화가 아니라 사대부의 복된 삶을 묘사한 상상화다.
평생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문과급제와 영예로운 관직생활이다. 문과에 급제해 한림겸수찬 같은 청요직을 거쳐 개성이나 평양 같은 대도시의 지방관으로 나가고 판서와 정승에 이르는 것이 사대부들이 꿈꾸는 최상의 삶이었던 것이다. 평생도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의 영예를 이어가길 바라던 사대부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일생의 큰 복은 수(壽), 부(富), 귀(貴), 강녕(康寧), 많은 자손(子孫衆多)으로 대표된다. 이 글자나 글귀들은 흔히 사용하는 생활용품 속에 문양의 형태로 등장한다. 복된 삶에 대한 기원을 길상문자라는 문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상문자 중에는 당연히 과거와 관련된 것도 있다. 여성들이 사용하던 실패나 직접 만든 자수품에는 ‘오자등과(五子登科)’ ‘오자출신(五子出身)’ ‘오자장원(五子壯元)’과 같은 글귀가 등장한다.
아들 다섯을 두는 것은 누구나 누리는 복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국가에서도 부모에게 특별한 은전을 베풀었다. 『경국대전』에는 다섯 아들이 등과하면 부모에게 매년 쌀을 하사하고 돌아가신 부모는 추증(追贈)하며 치제(致祭)한다는 조항이 있다. 실제로 1460년(세조 6) 안경(安璟)의 다섯 아들 관후(寬厚)·인후(仁厚)·중후(重厚)·근후(謹厚)·돈후(敦厚)가 과거에 급제해 국가에서 은전을 베푼 일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아주 드물었다.
‘오자등과’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복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섯 아들을 두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오자등과’를 새긴 공예품이 반드시 다섯 아들의 과거 급제를 기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많은 자식을 두고, 그 자식이 급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오자등과’라는 글귀는 별전(別錢)에도 보인다. 별전이란 오늘날의 기념화폐와 유사하게 겉은 화폐 모양이지만 돈으로서의 실질 가치는 없는 화폐를 가리킨다. 별전에는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축원을 담은 각종 문양을 새겼는데, 수복(壽福)·강녕 등과 함께 ‘오자등과’ ‘오자출신’ 등의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과거급제를 좀더 은유적으로 표현한 문양들도 있다. 흔히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을 등용문(登龍門)이라 한다. 이 말은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의 기록에서 유래한다. 그 설명에 따르면 황하 상류의 용문이라는 계곡에 높은 폭포가 있었는데, 여기를 뛰어오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여기서 어려운 관문을 뚫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등용문’이라 일컫게 되었다.
등용문을 묘사한 문양은 별전에도 보이지만 목판으로 제작해 부적으로 보급한 것도 있다. 넘실거리는 거친 파도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 잉어를 그린 그림은 ‘약리도(躍鯉圖)’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뛰어오르는 잉어를 그린 것이다. 이런 부적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등용문을 모티브로 하는 약리도는 그림이나 공예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사대부들이 쓰는 벼루나 연적, 필통, 그릇 등에서 이런 문양이 많이 보인다. 또 약리도를 따로 그리기도 했다. 이런 물건들은 모두 입신양명의 꿈, 곧 과거급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약리도에는 새우가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새우는 껍질이 딱딱한 갑각류다. 여기서 갑(甲)은 딱딱한 껍질을 의미하는데, 갑에는 제일이라는 의미도 있다. ‘갑’이라는 글자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이용해 껍질이 딱딱한 새우나 게를 장원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흔히 사용했다. 또 쏘가리는 한자 이름이 궐어(鱖魚)로 궁궐을 가리키는 ‘궐(闕)’자와 발음이 같아 출세의 상징으로 쓰였다.
‘오자등과’나 등용문을 묘사한 약리도는 널리 유행한 문양의 하나로,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는 개개인의 절박한 염원을 담은 것은 아닐 터이다. ‘오자등과’의 문구나 약리도는 과거를 보는 이에게는 급제에 대한 기원을 담은 것이요, 과거를 보지 않는 이에게는 길상(吉祥)을 의미하는 글귀와 그림으로 인식되었다.
과거 준비를 위한 학습 도구와 참고서
과거급제에 이르는 방법은 하나다.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과거는 유교 경전과 역사, 문장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문한 관료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작문 능력을 평가했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어려서부터 꾸준히 경서(經書), 역사서, 문장서 등의 책을 읽고 글을 짓는 공부를 해야 했다.
17세기의 유명한 문장가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노년에 자제들을 위하여 공부하는 법을 정리해 전수했다. 그가 읽기를 권한 책을 보면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 외에도 『자치통감강목』 『송감(宋鑑)』 등의 역사서, 『소학』 『가례』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성리군서(性理群書)』 『심경(心經)』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전서(朱子全書)』 등의 성리서가 필수 목록으로 나와 있다.
이와 별개로 과거 응시에 필요한 문장을 익히기 위해서는 여러 문장 선집들에 통달해야만 했다. 이백과 두보의 시, 당송팔대가의 문장, 『문선(文選)』 『고문진보(古文眞寶)』 『문장궤범』과 같은 문장서는 기본이었다. 이외에 일명 ‘마사(馬史)’라 불린 사마천의 『사기』와 ‘반사(班史)’라 불린 반고의 『한서』와 같은 역사서, 『노자(老子)』 『장자(莊子)』 『열자(列子)』 등의 도가 서적, 순자, 한비자, 양웅(揚雄) 등의 백가서도 참조해야 했다. 도가서나 백가서는 국가의 공식 교육에서 금하고 있었으나 문장을 익힐 때 참고서로 활용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식은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집, 『경국대전』 『국조전고(國朝典故)』, 소설 등도 읽을거리로 제시했다. 그리고 시험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륙변려문이나 앞사람들이 지은 답안인 과제문(科製文)도 별도로 익히도록 했다. 이식이 제시한 책들을 훑어보면 과거 공부가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책을 읽는다 해서 공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좀더 효율적인 공부를 하려면 여러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갖은 학습용 도구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책을 읽을 때 그 횟수를 세기 위해 만든 서산(書算)이다. 종이에 홈을 내어 하나씩 접어서 읽은 횟수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덕무(李德懋)는 어릴 때 매일 아침 40~50줄을 배우고 하루에 50번씩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곧잘 셈을 속였다고 한다. 이때 이 서산을 사용했을 것이다.
경서를 외우고 해석하는 강경(講經)시험을 준비할 때는 경서통(經書筒)을 비치하고, 활용했다. 과거의 강경시험은 책별로 가늘게 쪼갠 대나무 조각에 경서의 글귀를 적어둔 경서통을 만들어 응시자들이 하나씩 뽑아서 그 장(章) 전체를 외우고 해석하도록 했다. 민간에서 만든 경서통은 이에 대비한 것으로 일종의 모의고사용 도구였다.
경서를 외우기 위해 특별히 편집된 책이 간행되기도 했다. 정조대에 서유구(徐有榘)가 왕명을 받아 전국의 책판(冊板)을 조사하여 만든 『누판고(樓板考)』에는 평안도 감영에 소장된 『삼경사서강경(三經四書講經)』이라는 책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경서의 원문만 싣고 훈고(訓詁)를 생략한 책이라고 하는데, 현재 그 실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유구가 이것이 경서 암송을 위한 책이라고 특기하고 있어서 강경시험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 평안도 유생들은 강경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 책의 덕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짓는 법을 익히는 데는 초집(抄集)이라는 선집을 만들어 활용했다. 초집이란 책에서 문장을 뽑아 만든 것이다. 과거 공부를 할 때 초집을 만들어 활용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태종실록』에는 여러 신하가 합창하듯 유생들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 초집만 익힌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식이 자제들을 위해 쓴 글에서는 초집을 적극 활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자치통감강목』이나 『송감(宋鑑)』과 같은 역사서를 읽을 때는 좋은 내용을 뽑아 한두 권을 만들어 수십 번씩 읽도록 했고, 문장을 공부할 때에도 문체별로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뽑아 몇 권으로 묶어 반복적으로 읽으며 익히도록 했다. 초집을 만들어 공부하는 것은 편법이기는 해도 좀더 효율적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초집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먼저 과거에 합격한 답안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과거 답안은 정해진 격식이 있었는데, 앞서 합격한 답안은 응시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합격한 답안을 모은 선집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 『문종실록』에는 주자소에서 몰래 대책문(對策文)을 찍었는데, 관료들이 자제들을 위해서 앞 다투어 책을 얻으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553년(명종 8)에는 유생들이 과문을 공부할 때 모범으로 삼을 수 있도록 대제학으로 하여금 율부(律賦) 10편, 표(表)·전(箋) 각 3편, 대책 5편을 뽑아 간행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실물이 현전하는 간행 도서로는 16세기에 만든 『동국장원책(東國壯元策)』 『동국장원집(東國壯元集)』 『전책정수(殿策精粹)』 『동책정수(東策精粹)』 등과 임진왜란 직후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진영수어(震英粹語)』가 있다.
간행본 외에 개인들이 만든 초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전한다. 이때의 초집은 책이라기보다는 필기 노트로, 자신의 취향이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했다. 제목도 제각각인데, 우리나라의 책문을 모은 『동책(東策)』, 부(賦)를 모은 『동부(東賦)』, 표문(表文)을 모은 『동표(東表)』와 같은 제목으로 정리한 것이 많다. 그렇지만 제목이 같더라도 내용은 제각각이다.
표문이 중시되던 조선 후기에는 특별히 표문 1000수를 뽑아 쓴 『천수표(千首表)』가 유행했다고 한다. 『취대(取大)』라는 책에는 아들이 변려문 한 궤짝을 들고 와서 1664수를 뽑아 필사하여 세 권의 책으로 묶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이나 손자의 과거 공부를 위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초집을 만들어주는 것도 흔히 있는 일이었던 듯하다.
학교 시험의 목적은 공부한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발 시험은 합격을 목표로 하는 시험이다. 극심한 경쟁을 뚫고 합격에 이르려면 좀더 효율적인 공부법이 필요하다. 초집도 그중 하나다. 공부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초집을 위주로 한 공부를 천시하고 비판했으나 수험생 입장에서는 좀더 능률적인 공부 방법이었다. 그 결과 과거 수험서라는 독특한 서적들이 편찬되고 유통되었다.
과거 여행길, 그리고 영광의 증서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유생들은 길을 떠나기 위하여 행장을 꾸린다. 과거시험장까지 먼 길을 가고 또 장기간 외지에서 체류해야 했던 만큼 짐도 많을 수밖에 없다. 영조대 황윤석(黃胤錫)이 상경할 때 가지고 간 물건을 보면 옷이나 세면용품, 의약품처럼 오늘날에도 가져갈 법한 물품들이 있는데 그 종류는 훨씬 더 잡다하다. 그중에는 이불과 베개, 자리도 있다. 상대적으로 서비스업이 덜 발달한 시절에는 집을 나설 때 더 많은 물품을 지고 가야 했다. 그래서 양반들의 여행길에는 늘 짐을 질 노비가 동행했다.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빠뜨리면 안 되는 물건이 붓, 벼루, 먹과 같은 문방구다. 그러나 여행에 가져가는 물품인 만큼 지나치게 크거나 무거우면 곤란했다. 황윤석은 여행 중에 가져간 벼루를 ‘행연(行硯)’, 붓을 ‘금낭필(錦囊筆)’이라고 기록했다.
‘행연’은 여행용 벼루라는 뜻으로 보통의 벼루에 비해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연(小硯)’이라고도 했다. 보통의 벼루가 작게는 10센티미터, 크게는 20센티미터에 이르는 데 비하여 행연은 대개 10센티미터 이하였다. 또 보통의 벼루에는 화려한 문양을 새겨넣었지만 행연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한 형태를 띠었다. 여행 중에 사용해야 하는 만큼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고 단순한 형태의 벼루를 선호한 것이다.
‘금낭필’은 금낭(錦囊), 곧 비단 주머니에 넣는 붓을 의미한다. 여행 중이라도 붓은 용도에 따라 여러 자루가 필요했다. 황윤석은 작은 붓(小筆), 중간 크기 붓(中筆), 일기용 붓(日記筆)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기도 했다. 여러 자루의 붓을 요령 있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필낭(筆囊)으로, 여러 자루의 붓을 넣고 말아서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필통이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휴대용 문방구함도 있다. 나무로 짜인 상자 안에 붓, 벼루, 먹, 연적 등을 넣는 자리가 만들어져 있고, 종이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서랍도 있다. 이런 물건은 황윤석이 가지고 다니던 행연이나 필낭에 비하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아무래도 좀더 부유한 층에서 사용했을 듯하다.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꼭 가져가야 했던 물건은 시험 답안을 작성할 시지(試紙)였다. 오늘날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나누어주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응시자인 유생들이 직접 답안지를 장만해서 가져가야 했다.
유생들은 이왕이면 고급스럽고 큰 종이를 준비하려 했기에 조정에서는 종이의 지질과 규격을 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규격은 시험마다 달랐는데, 1717년(숙종 43)의 규정에 따르면 생원·진사시 시지는 세로가 포백척 1척 4촌(약 64센티미터), 가로가 4척 5촌(약 207센티미터)이었고, 알성시·정시 등 친림시 시지는 세로가 2척 6촌 5분(약 122센티미터), 가로가 1척 9촌(약 87센티미터)이었다. 식년시·증광시·별시 문과에는 특별한 규정이 없었으나 생원·진사시와 비슷한 규격을 사용했으며, 가로로 장수를 늘릴 수 있었다.
시지를 장만하면 먼저 오른쪽에 응시하는 유생과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나 부친의 인적 사항을 기재했다. 이때 응시자들은 합격의 기원을 담아 먼저 급제한 사람들에게 이를 대신 써주기를 청했다고 하는데, 글씨를 써주는 이를 ‘복수(福手)’, 곧 복손이라 불렀다고 한다.
응시자들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시지를 들고 잔뜩 긴장한 채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 문제가 걸리면 재빨리 답안의 내용을 구상하지만 주어진 제목에 맞춰 좋은 내용을 구성하는 것도, 좋은 글귀를 생각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유생은 제출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답안을 완성하지 못했다. 답안을 제출한 유생들은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는 안도감과 합격에 대한 기대 및 불안 속에서 과거시험장을 빠져나왔다.
시험이 끝나면 채점을 하는 시관(試官)들이 바빠졌다. 시관들은 먼저 제출된 답안을 열 장씩 묶어 축을 만들고, 천자문으로 순서를 매겼다. 그리고 같은 축 내에서는 일이삼 순서로 다시 순서를 매겼다. 이에 따라 답안지에는 ‘십지(十地)’와 같은 방식의 제출 순서가 기재된다. ‘지(地)’자는 축을 가리키며 십(十)은 축 내에서의 순서를 말한다. 곧 십지는 지자축(地字軸) 가운데 열 번째 답안이라는 뜻이다.
답안 정리가 끝나면 시관들이 채점을 시작한다. 문제마다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갱(更), 외(外) 등으로 성적을 매겼다. 식년시·증광시·별시 문과는 채점을 더 엄격히 하기 위해 사본을 작성해서 채점했는데, 사본에는 성적을 기재하고 원본에는 ‘일지일(一之一)’과 같은 형식으로 등수를 기재했다. 과거의 등수는 1등 몇 명, 2등 몇 명, 3등 몇 명으로 나뉘며, 같은 등수 안에서 다시 등위를 매겼다. ‘일지일’은 1등 가운데 첫 번째라는 뜻으로 곧 장원이라는 의미다.
최종 단계의 시험인 문과 전시나 생원·진사시 회시 때는 합격 답안에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의 종이를 붙여 시험 종류와 등수를 기재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첨지에는 ‘무오식년문과병과제십육인망(戊午式年文科丙科第十六人望)’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무오년의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제16등 합격자 후보라는 뜻이다. ‘망(望)’이라고 쓴 것은 국왕에게 후보로 추천한다는 의미였다.
채점이 끝나고 합격자가 결정되면 방(榜)을 내어 이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합격자에게는 답안지를 돌려주었다. 낙방한 답안지는 시관이나 각 관서에 나누어주어 재활용하도록 했다.
현재 전하는 과거시험 답안지는 모두 과거시험의 어느 한 단계에서 합격한 답안지다. 비록 최종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초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본인과 후손들에게 큰 영예가 되었다. 시권은 그 증명서였다. 따라서 후손들도 이를 소중히 간직했으며, 현재까지도 수많은 시권이 전하고 있다.
최종 시험에 합격하면 왕명으로 발급한 합격 증서를 나누어주었다. 문과와 무과는 붉은색 종이로 합격 사실을 기재한 홍패(紅牌)를, 생원·진사시에는 흰 종이에 쓴 백패(白牌)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관복을 입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삼일유가(三日遊街)에 나섰다. 말에 높이 올라 앞뒤로 무동(舞童)을 거느리고 자랑스럽게 거리로 나서는 순간 합격자의 머릿속에는 온갖 감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을 것이다.
모든 과거가 끝나고 나면 해당 시험의 시관과 합격자 명단을 정리한 방목(榜目)을 만들었다. 문과와 무과는 하나로 합쳐 문무과방목을 만들었는데, 용호방(龍虎榜)이라고도 불렀다. 생원·진사시는 별도로 사마방목(司馬榜目)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연방(蓮榜)이라고도 했다. 방목은 합격자들이 일생 동안 동방(同榜)으로서 우의를 다지는 기념물이 되었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과거급제를 위한 길에 접어들었다. 각 가정에서는 아들의 과거급제를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쏟았다. 그 정성과 노력이 일상의 생활용품과 과거 수험서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시권, 홍패·백패, 방목과 같은 영광의 증서가 주어졌다. 이 증서의 효력은 비단 본인과 한 가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합격의 징표는 두고두고 한 집안의 성취와 위상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후손들은 신줏단지 모시듯 선조가 남긴 영광스런 유물을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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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공저 『서양인이 만든 근대전기 한국이미지 2 : 코리안의 일상』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논문 「16~17세기 예안현 사족사회 연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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