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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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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1년(고종 18) |
사망 | 1909년 |
경력 | 건국훈장 국민장 |
유형 | 인물 |
직업 | 의병 |
성별 | 남 |
분야 | 역사/근대사 |
본관 | 경주(慶州) |
요약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초장과 좌령장으로 활약한 의병.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 출신. 1896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전개되자 의병부대에 입진하였으나 의병부대 해산조치에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6년 을사의병의 일환으로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휘하에서 초장(哨長)과 좌령장(左領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중도에서 귀대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고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환직이 청하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한편, 당시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공석인 채 이미 구심력을 잃고 소규모의 유격부대로 재편되어갔다. 이에 소수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장기와 청하 등지를 진격,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이어서 울산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의 복병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뒤 휘하의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여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7월에 붙잡혔다.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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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 ・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 ・ 『독립운동사자료집』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 ・ 『조선독립운동』1(김정명 편, 原書房, 1967)
- ・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 ・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국, 1934)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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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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