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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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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98년(선조 31) |
사망 | 1680년(숙종 6) |
경력 | 백령첨사, 이산군수, 풍천부사 |
유형 | 인물 |
관련 사건 | 병자호란 |
직업 | 무신 |
성별 | 남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본관 | 경주(慶州) |
요약 조선후기 백령첨사, 이산군수, 풍천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숙(靜叔). 할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언후(吳彦厚)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가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벼슬에 나갔다. 1631년에 북방 야인이 자주 침구하므로 자진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였으며, 예조판서라 가칭하여 청나라 진지에 왕래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홍원현감·영암군수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으나, 당시 평안·황해 양도가 호란으로 인하여 문란하여졌던 민정(民情)이 회복되지 않았고, 연행(燕行)의 요충지이며 청나라 사신들이 빈번히 왕래하는 곳이어서 많은 읍들이 피폐하였으므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638년에 영원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뒤 양덕현감·수안군수를 거쳐, 1651년(효종 2)에 백령첨사·이산군수·풍천부사·신천군수·서흥부사를 지냈다. 그 뒤 1664년(현종 5)에는 장연부사·상원군수 등 관서지방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풍천부사에서 체임(遞任)할 때에는 오직 쌀 한 섬만을 싣고 귀향할 만큼 청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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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인조실록(仁祖實錄)』
- ・ 『사마방목(司馬榜目)』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청성집(靑城集)』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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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기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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