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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의 장로교는 8·15해방과 더불어 신학노선의 차이, 교회정치의 문제 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러한 분열은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신학 사상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949년 남부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지정하고 1951년 대구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폐교한다는 의도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자 조선신학교는 이에 불복하고 1952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을 경기노회에 명하여 목사직을 제명시키자 이에 9개 노회의 대표 47명이 1953년 6월 10일 기독교장로회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했다. 이듬해 6월 1일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고쳤고, 1961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 등 4개의 외국 선교부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전래되어 일제의 심한 압박 속에서도 단일 교단을 유지했다. 그러나 8·15해방과 더불어 신학노선의 차이, 신앙의 경건성 문제, 교회정치의 문제 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이는 곧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탄생시킨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열은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한국신학교의 전신) 교수들의 신학 사상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신학교측의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에 대한 비판이 8·15해방 이후 표면화되면서 1949년 6월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가 박형룡을 교장으로 개교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49년 남부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지정하고 1951년 대구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통합·폐교한다는 의도로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자 조선신학교는 이에 불복했다. 오히려 조선신학교는 1952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1952년 4월 대구에서 가진 제37회 총회에서 성서오류설을 주장한 김재준을 경기노회에 명하여 목사직을 제명시키자 이에 9개 노회의 대표 47명이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 강당에 모여 기독교장로회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했다. 이듬해 6월 1일 교단의 명칭을 대한예수교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고치고, 1956년 여장로제도를 채택했다. 1957년 한국기독교연합회에 가입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에서 강북구 수유리로 이전했다.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 세계대회에서 강원용이 실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때 교파명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1970년대 독재정치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 신앙과 양심의 수호를 위해 3·1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는 등 정부와의 잦은 마찰로 한국신학대학의 학생과 교수, 교역자들이 수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0년 기독교장로회의 신학교육을 담당한 한국신학대학이 한신대학으로 종합화되었다.
기독교장로회는 교육정책과 지침서(1970), 사회선언지침(1971), 신앙고백선언서(1972), 선교정책(1973) 등 교단의 기본 신학과 선교방향을 제시한 문서 등을 남겼다. 총회 산하 13개의 노회와 월간 〈기장장로회보〉를 발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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