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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파리 유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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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1년 동안 붙잡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뜻에 완강히 저항했다. 마침내 그는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 1245년 가을 파리로 가서 파리대학교 내에서 도미니코 수도회 중심지가 되었던 생자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폭넓은 지적 관심을 가지고 있던 탁월한 학자 대 알베르토 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토마스는 봉건세계로부터 탈출한 직후 파리대학교 생활에 몰두하고 새로 설립된 탁발수도회에 종교적 소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제도 및 개념구조에 대한 신념이 공격을 받고 있던 세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복음과 당대 문화의 만남은 토마스가 세운 견해의 핵심을 이루었고, 그 견해의 발전을 이끌었다. 대체로 그의 업적은 그당시 새로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시킨 것이라고 간주되며, 이것을 그리스도교 역사의 처음 12세기 동안 교부들의 영향 아래 플라톤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한 것과 비교하곤 한다.

이같은 견해는 대체로 정확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토마스의 업적은 개개인의 삶과 교회 전반에 걸쳐 문화적·영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복음적 각성을 실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마스는 한편으로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주의로부터, 또다른 한편으로는 도미니코 수도회를 설립한 성 도미니코의 학문적 열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탁발 종교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교에 왔을 때는 아라비아-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유입되어 신자들이 이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교회 당국은 이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는 자연주의 및 합리주의를 여러 차례 봉쇄하려고 했다. 여러 고위성직자들은 이 자연주의와 합리주의가 젊은 세대를 유혹한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이 새로운 사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스승 대 알베르토나 파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던 로저 베이컨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연구하고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의했다. 그당시 그리스도교도들과 신학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 합리주의의 엄격한 요구에 직면했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농업사회의 초급 경제로부터 벗어나 도시사회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사회는 생산, 시장경제, 깊은 공동체 의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성직자들을 위시해 새로운 세대의 남성들과 여성들은 세계를 경멸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반기를 들었고, 이성을 이용하여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구조는 지성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기술 그 자체는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기술은 우주를 인간화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스콜라 철학을 지배해왔던 보편개념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붉다'라는 일반개념과 '이 붉은 것'이라는 특수개념의 상호관계에 대한 물음)은 뒷전으로 밀리고, 지식과 세계에 관한 일관성 있는 형이상학이 발전되었다(→ 스콜라주의).

1248년 여름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와 함께 파리를 떠났다. 알베르투스는 쾰른 수도원에 도미니코 수도회가 새로 설립한 대학의 학장을 맡았다. 토마스는 1252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신학석사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학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자격(licentia docendi)을 얻었으며, 그 직후 교수라는 칭호와 특권 취득에 필요한 훈련을 마쳤다. 1256년부터는 파리대학교와 합병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두 학교들 가운데 한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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