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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7. 5. 15, 인도 캘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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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05. 1. 19, 캘커타 |
국적 | 인도 |
요약 근대 인도의 철학자·종교개혁가.
힌두교 및 힌두교적 생활양식의 폐습들을 정화하기 위해 결성된 '브라모 사마지'(브라마 신을 섬기는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벵골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9세에 공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인도의 고전 언어인 산스크리트를 비롯하여 페르시아어와 영어를 배우고 서양철학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그는 자신보다 젊은 동료 개혁가 케샵 천더 센과 깊은 친교를 맺었으며, 당시 특히 벵골 지방에서 널리 유행하던 관습 수티(과부가 죽은 남편을 화장하는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분신하는 것)에 대하여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센과 함께 인도의 문맹률을 낮추고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베풀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센이 그리스도교 쪽으로 기울어진 것과 달리 상당히 보수적인 힌두교도로 일관했다. 두 사람 사이의 이러한 사상적 차이로 인해 1866년 브라모 사마지는 분열되었다.
그러나 타고르는 힌두교의 우상숭배 및 화합을 막는 비민주적인 인습들의 일소를 열망해 궁극적으로는 고대 힌두교 경전인 베다 전체를 배격했으며, 아무리 존중할 만한 문헌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행동에 완벽하고 만족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철저한 합리주의와 광신적이고 보수적인 브라만 전통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 채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났으나, 소규모 추종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63년 벵골의 한적한 시골에 '샨티니케탄'(평화의 거처)이라는 은거처를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이며 시인으로 유명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이곳에 학교를 세워 국제적인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죽을 때까지 마하리시('위대한 성자')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그의 수많은 저작들은 모두 그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씌어졌는데, 그중 한 작품이 〈베단타의 교설에 대한 옹호 Vedantic Doctrines Vindicated〉(1845)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다. 산스크리트 경전들에 대한 그의 벵골어 주석서 〈브라마 신의 가르침 Brahmo-Dharma〉(1854)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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