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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클리퍼드

다른 표기 언어 클리퍼드 , Sir Hugh Charles Clifford
요약 테이블
출생 1866. 3. 5, 런던
사망 1941. 12. 18, 런던 로햄프턴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식민지 관료, 말레이 반도의 총독, 소설가, 수필가.

클리퍼드(Sir Hugh Charles Clifford)

ⓒ The Straits Times/wikipedia | Public Domain

찰스 2세 시대의 커밸 정부에 봉직했던 클리퍼드의 후손이자 처들리 남작 7세 클리퍼드의 손자이다. 유명한 장군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 육군에 입대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친척 프레더릭 웰드 경이 행정장관으로 있던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 서쪽의 주들을 지배한 지 채 10년이 지나지 않은 1883년에 17세로 말레이 반도에 온 클리퍼드는 페락에서 학생 군사훈련단원이 된 이래 20년이 넘게 말레이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당시의 다른 지방행정관들처럼 그는 현지 언어를 익히며 오랫동안 벽지에서 생활했다. 이러한 경험, 특히 1887년부터 2년간 영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파항 주에서 지낸 경험 덕택에 이국적인 것에 대한 낭만적인 취향을 갖게 되었으며, 이것을 1896년 이후에 발표한 많은 수필, 단편·장편 소설의 주제로 삼았다. 1895~1903년에 파항 주의 총독 대리로 재직하고, 그 사이에 잠시 북부 보르네오와 라부안의 총독으로 일하는 등 고위직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그전처럼 말레이 반도 사회의 여러 계층과 어울릴 수 없게 되었다.1909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당시 말레이 반도에 살던 프랭크 스웨트넘처럼 클리퍼드의 작품도 영국에서 꽤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조지프 콘래드는 그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한 사람에게서 유능한 통치자와 나무랄 데 없는 플루트 연주자를 동시에 기대할 수는 없다"라고 썼다. 클리퍼드는 예술성은 부족했으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던 말레이 토착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그 사회의 와해를 주도한 중심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아쉬워한 낭만적인 양면성을 보였다.

트리니다드의 식민지 대신이 되어 1903년 말레이 반도를 떠난 뒤 실론(지금의 스리랑카)·가나·나이지리아의 총독을 차례로 지냈다. 말레이를 떠난 뒤에도 여러 해 동안 그곳에 대한 글을 계속 썼으며, 기존 작품을 재출판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말레이만큼 만족을 느끼지 못한 클리퍼드는 1927~29년에 해협식민지 총독과 말레이 연방 행정장관을 지낸 것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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