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출생 | 미상 |
---|---|
사망 | BC 219 |
국적 | 스파르타 |
요약 스파르타의 왕(BC 235~222 재위).
스파르타의 정치구조를 재편성했으며 아카이아 동맹을 분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아기스 왕가 출신의 왕으로 레오니다스 2세의 아들이었다. 시키온의 아라토스가 주도하던 아카이아 동맹과는 BC 229년부터 충돌했다. BC 227년 클레오메네스는 리카이움 산과 메갈로폴리스 근처 라도케이아에서 아카이아 동맹군을 물리쳤다. 또 이듬해에는 만티네이아를 함락하고 디메 근처에 있는 헤카톰바이움에서 동맹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클레오메네스가 팔레네·플리오스·아르고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손에 넣자 아라토스는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도손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BC 224년 안티고노스는 코린트 근처에서 클레오메네스의 저지선에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아르고스에서 클레오메네스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남에 따라 스파르타는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으며 결국 BC 222년 클레오메네스는 셀라시아(스파르타 북쪽)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했다.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클레오메네스는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에우에르게테스에게 도망갔다. 에우에르게테스의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 왕은 클레오메네스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그는 탈출해(BC 219)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주도하여 실패하자 자살했다.
BC 227년 클레오메네스가 단행한 개혁은 선왕인 아기스 4세(BC 241 죽음)의 개혁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클레오메네스는 채무를 말소시켰으며 토지를 재분배해 4,000명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젊은이들을 훈련시킨 스파르타의 옛 교육방식을 부활시켰다. 선출된 5명의 행정관(에포로스)으로 이루어진 통치체제는 이전에는 왕과 함께 정부의 주요집행부를 구성했으나 클레오메네스 때 폐지되었고(에포로스 5명 가운데 4명이 처형당했음) 평의회의 권한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파트로노모이'(6명의 원로로 구성된 기구)는 이때에 도입된 듯하다. 또한 군대는 예전보다 길이가 긴 창을 쓰도록 훈련받았다. 클레오메네스는 개혁을 통해 헤일롬타이(농노 신분)와 페리오이코이(참정권이 없던 특별계층)를 배제한 귀족사회를 다시 스파르타에 실현시키려 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