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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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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외관계는 외형적으로는 명분론에 따라 구조화되어 사대교린을 기본 방침으로 했으며 중국과는 사대관계를, 주변국과는 교린관계를 유지했다.

중국과의 대외관계를 살펴보면, 고려 말기 권문세족들이 원나라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창업된 초기의 대명관계에서는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 사신 입국 금지, 종계변무(宗系辨誣) 등 몇 차례 어려운 사정이 있었으나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파병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명과 청의 전쟁 때는 명에 5만 명의 원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사절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동지사(冬至使)의 정기 사절이 있었고, 그밖에 군주사망·책봉·책비(冊妃) 등 경조사나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도 파견되었다. 이때 문화수입과 무역도 이루어졌다. 주요수출품은 말·인삼·모피·모시·화문석이었으며, 수입품은 견직물·약재·서적·도자기였다. 초기에는 금·은·우마(牛馬)·처녀·화자(火者) 등 어려운 요구도 있었으나 세종 이후에는 거의 완화되었다.

한편 만주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했다.

복속한 여진의 추장들에게는 관작을 주고 무역을 열어주면서 여진의 부족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여진족 내부도 복잡하고 북방에는 호전적인 부족이 많아 무력충돌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세종에서 성종연간에는 4군6진의 확보로 수차례 대규모 정벌이 행해졌다. 이후 여진족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으나, 선조 때의 니탕개(尼湯介)의 난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7세기에 건주좌위 출신인 누르하치[奴爾哈齊]가 후금(1636년에 으로 개명함)을 건립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후금이 명과 대립하자 조선은 배금정책을 분명히 했고, 그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결국 조선은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명이 멸망한 후에도 만동묘를 설치하는 등 숭명배청의 풍조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효종 때는 북벌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간의 공식적인 관계는 명과의 사대관계를 계승하여 청과의 관계에서도 사대관계가 유지되었다. 문화수입과 무역은 오히려 증가했는데, 사신에게는 사무역이 허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 사신을 통해 서양문물와 천주교가 수입되었다.

국경에는 시장이 개설되었고 조선 후기에 국내상업이 발달하자 밀무역인 후시(後市)도 성행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대외관계는 중국과 달리 긴장의 연속이었다.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 대규모 전투를 벌여 왜구를 소탕하고, 1419년에는 쓰시마 섬 정벌까지 감행했다. 이후 왜구가 수그러들자 이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했다.

일본이 필요로 하는 물품은 주로 미곡과 면포였으며, 그밖에 공예품·대장경·서적 등을 자주 요구했다. 수입품은 국내에서 희귀한 동(銅)·석(錫)·후추·약재 등이었다. 1510년(중종 5)에 삼포왜란이 발생하여 외교가 단절되었다가, 일본의 청원으로 1512년에 다시 재개되었으나 세견선(歲遣船)과 교역물자를 절반 이하로 제한했다. 1592년에는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 7년간의 전쟁 끝에 조선은 일본을 물리쳤으나 이 전쟁은 큰 피해를 남겼고,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약탈로 도자기와 활자가 발달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수입되었다. 1609년 다시 일본과 외교를 재개하여 특별히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문화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국세성장과 더불어 서양 문화를 수입하게 된 그들은 1811년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통신사의 입국를 거절했고 그후 통신사는 폐지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침략이 다시 개시되었고,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면서 한·일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교린관계에 있던 다른 국가로는 류큐[琉球 : 오키나와(沖縄)]가 있었다. 류큐와는 온건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며 교류도 비교적 잦았다. 류큐를 통해 안남·샴·남만 등 동남아시아의 물자가 중계되었는데, 이들 국가에서 역사(力士)와 토산물을 진상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정규적인 교류는 개설되지 않았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인이 표류해오고 외국 배들이 간간이 해안에 출현했으나,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때까지 철저히 쇄국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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