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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장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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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고대
  3. 중세
  4. 르네상스에서 현대까지

개요

장신구의 역사는 고분 발굴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신분·계층의 표현이나 주술적인 상징으로 쓰이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치장과 순수 장식적인 용도로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디자인, 사회적 지위).

인간이 옷을 만들기 전부터 조개껍질이나 생선뼈, 나뭇잎 등의 자연물을 몸에 부착하는 것이 최초의 장신구인데 이는 오래된 동굴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이 옷을 입지 않은 알몸에 모자, 긴 목걸이, 팔찌 등을 달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선사시대인). 또한 장신구는 다양한 형태로 머리·허리·팔꿈치·귀·코·입술·목·가슴·배·팔·종아리·다리·발 등 몸의 곳곳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BC 3000년으로 추정되는 수메르우르에 있는 푸아비(Pu-abi) 왕비무덤에서 나온 장신구들이 고대 중동과 서부의 가장 오래된 장신구들이다.

금잎사귀 모티프로 만들어진 3개의 왕관을 비롯하여 왕비는 금·은·청금석(靑金石)·홍옥수(紅玉髓)·아게이트[瑪瑙]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고, 귀에는 커다란 금귀걸이가 달려 있으며 준보석이 3줄로 엮어진 목걸이 및 손가락에 끼워진 수많은 반지와 허리·가슴·어깨 부분이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현대 장신구에 비해 원시시대에 장신구의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으며, 각 신체부위마다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속세공기술도 높은 수준에 이르러 땜기법·합금법·선세공(filigree)·돌가공·칠보기법까지도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장신구는 투탕카멘(18왕조:BC 1567~1320)의 분묘가 발굴됨으로써 당시의 금세공술이 세계에 알려져 전형적인 이집트 장신구의 특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유의 주술적·종교적인 믿음 속에서 성장한 순수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이집트 장신구는 좌우대칭 속에서 형태와 색채로 율동감 있게 반복시켜 다양한 구성을 만들어냈다(→ 색인:도상학). 또한 기본적인 기하학적 구조 안에서 다양한 색채의 재료를 일렬 배치하거나 다른 재료와 엇갈리게 사용하여 대비효과를 얻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즉 원통·원·원추·원반 형태의 목걸이 구슬들에 금, 홍옥수, 터키석, 청금석, 접착제로 부착된 도자파편 등이 색채별로 나열되어 있다.

18왕조에 들어서면서 이집트 양식은 수입된 외국의 장신구에서 영향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왕조에 이르러 위대한 기념비적인 이집트 문화는 점점 사라져가고 점차 그리스 문화로 흡수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중해의 크레타 섬은 동양·서양·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로서 BC 2000년부터 풍요함을 축적하고 있었고, 이에 비례하여 높은 수준의 예술적 감각을 표현한 섬세한 금세공도 발달했다.

금세공(goldwork)

15세기 금세공 마스터의 작업 모습을 표현한 그림.

ⓒ Goodness Shamrock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러한 크레타 섬의 문화적 부(富)는 인근 섬들과 그리스 본토에 퍼졌고, 특히 미케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의 괄목할 만한 세공기법은 그래뉼레이션(Granulation)과 누금세공이였고 가장 보편적인 기법은 한 가지 문양의 패턴을 반복하여 장신구나 의상에 장식하는 스탬핑 기법이며, 둥근 것, 타원, 리본형 등 기하학적인 것과 꽃·나무·동물·나비 등 자연물의 모티프를 사용했다.

장신구 교역의 중심지였던 페니키아는 그 지역 특유의 장신구는 개발하지 못했지만 지중해 연안의 북부 아프리카, 사르데냐,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지역의 양식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BC 8~7세기에는 중동지방에서 건너온 동물을 주제로 한 문양이 퍼져나갔고, 지중해 연안국들을 통해 동양양식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유행되었다(→ 색인:동방화기). 에트루리아는 페니키아를 통해 들어온 동양적 모티프와 기술, 양식을 점차 더 발전시키면서 세계 장신구 역사에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선세공과 그래뉼레이션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브로치 제작에도 종래의 한 금속판만을 사용하던 것을 지양하고 길게 늘어뜨렸으며, 동물주제의 장식은 누금기법이나 금가루 뿌리는 기법으로 평면판 위에서 좀더 부각시키는 양식이 많이 쓰여졌다.

브로치 (brooch)

3세기 헬레니즘 예술, 그리스 장인이 만든 브로 간자 브로치

ⓒ Manuel de Corselas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스는 BC 7~6세기에 걸쳐 동양의 모티프와 기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쟁하는 장면, 동물형태 등 사실적인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색인:그리스 예술). 그러나 점차 반지 등에서 복잡한 전쟁 장면이 사라지고 단순한 인물상으로 바뀌면서 그리스 양식이 개발되는 시점이 되어 절제된 형태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 양식의 특징이 나타난다(→ 색인:고전기). 따라서 축소된 인물조각, 종교적·미신적·영웅적 인물을 주제로 한 조각이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시대는 대략 BC 325~27년 로마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지속되어온 그리스 문화가 발칸 반도로 확대되어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후 장신구의 번성기를 맞이한다.

특히 이시기는 금채광작업이 활발해지고 정복한 페르시아로부터 약탈한 보물 때문에 양과 질이 뛰어난 금세공이 발달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이 발달되면서 일반화된 장신구는 섬세함과 대비된 장식으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리듬 있게 배열된 양식이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고대로부터 마력의 매듭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 매듭이 장신구 중에서도 호신의 상징으로 팔찌·허리띠·반지 등에 쓰였다.

특히 BC 3세기에 뱀 모양의 팔찌가 혁신적인 양식으로 처음 등장하면서 반지에까지 응용되었고 이 모티프가 로마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퍼졌던 로마의 장신구는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 금속세공의 중심지가 되자 더욱 활발한 장신구 양식이 발달되었다. 특히 금세공 가운데 귀족계급의 신분표시를 했었던 금반지가 차츰 평민과 군인까지도 끼는 장신구로 유행되었고, 초기의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에서 벗어나 로마 특유의 양식이 만들어졌다(오푸스 인테라실레). 그리스 양식에서 넘어온 뱀 모양의 장신구를 비롯하여 귀걸이·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모티프도 기하학적인 것, 식물 모양, 개 모양, 나선 모양, 둥근 모양 등으로 다양해졌다.

오푸스 인테라실레 (opus interassile)

고대 로마 시대, 오푸스 인테라실레 기법으로 만들어진 금팔찌

ⓒ FAE / wikipedia | CC의 BY-SA 3.0

그외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반달과 4개의 살이 있는 바퀴 등 새로운 주술적인 자연물이 나타났고, 토파즈·에메랄드·루비·사파이어·진주 같은 유색 보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기법은 금속망과 사슬을 이용해 거기에 반구의 진주나 보석을 알물림하고 잎사귀를 매달기도 했다. 후기에 들어서는 펜던트 형태도 생겨났고 AD 3~4세기에 와서는 목걸이에 황제의 초상화가 있는 메달이나 금화가 매달렸다.

중세

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로마의 문화가 AD 4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그 위력을 이어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왕국은 중동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동방문화를 건설했다.

동양의 영향과 종교적 필요성이 통합되면서 새롭고 독특한 비잔틴 양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색인:비잔틴 예술). 즉 자연물을 모티프로 양식화된 패턴이 만들어졌고 금속세공인 필리그리와 칠보, 보석과 진주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비잔틴 장신구의 전형적인 형태인 반달 모양의 귀걸이는 12세기에 널리 퍼져나갔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장식기법은 아라베스크 문양과 복잡한 모티프를 선세공으로 만들었고 꽃, 새 모양 등은 칠보기법을 사용했다.

아랍이 이란을 점령한 후 이슬람 공동체에는 동물 형상을 나타내는 이란의 전통이 지켜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티프가 변형·양식화되어 12세기에 만들어진 금 목걸이 등에서는 상당히 양식화된 그래뉼레이션의 장식을 볼 수 있게 된다(→ 색인:이슬람 예술). 이슬람의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터키의 장신구는 남녀가 모두 치장했는데 반지·귀걸이·팔찌와 더불어 터번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옥·경석 등에 금으로 나선형 꽃 모양을 한 장식 모티프들을 장식했다(→ 색인:오스만 제국).

르네상스에서 현대까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많은 분야에서 문명의 발전을 일으켰고 장신구에서도 보석장식세공과 귀금속 연마 기술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금과 은은 단순히 보석을 아름답게 하는 부속물로 격하되었고 보석은 그 가치가 상승되었다. 그중 다이아몬드, 루비의 적색, 사파이어의 청색, 에메랄드의 녹색같이 화려한 색채의 보석을 이용하여 새로운 디자인과 조형미를 추구했으며 당시의 유명한 기베르티·브루넬레스키·폴라이우올로·보티첼리 등의 화가들이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세공기법을 완벽히 구사하여 훌륭한 장신구와 금속공예품을 제작했다. 장신구의 기능도 지금까지 교회와 교황을 위한 종교적 상징성을 띤 것에서 인간의 치장을 위한 장식적 역할로 바뀌어갔음을 목과 어깨가 노출된 의상을 입은 여인이 보석 달린 목걸이를 화려하게 걸고있는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보석 애호가 극치에 달하면서 기술 발달도 절정에 이르러 기본적인 보석세공인 각면깎이와 둥근면깎기로부터 16개의 면을 가진 연마기술이 개발되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보석의 광채와 미를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돌을 깎아 사실적인 형태를 새겨넣는 인탈리오(Intaglio) 기법을 많이 사용했으며, 여기서 배경을 깎아버리는 돋을새김을 아게이트를 사용해서 하는 카메오(Cameo) 기법 등이 널리 쓰였다.

17세기에 이르러 그때까지 종교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교황이나 사제만이 끼었던 반지가 귀족사회에서 약혼반지·결혼반지로 교환되는 새로운 기능이 생기게 되었다.

이 반지는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식물 잎사귀, 리본, 꽃 등 아름답고 우아한 선을 이용한 모티프를 주로 사용했다(→ 색인:꽃과 잎장식).

루이 14세헨리 8세 시대에는 보석과 장신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당시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전신이 보석으로 치장되었으며, 귀족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많은 장신구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값비싸고 화려한 색채의 디자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독점되어온 보석 장신구가 일반 시민에게 넘어오게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19세기초 장신구 양식의 특징은 고딕·르네상스·그리스·로코코·스페인·인도풍 등 각 양식이 혼합된 것이며 이러한 특성을 가미한 러시아 작가의 〈부활절 계란〉은 후세에 남겨질 걸작이다.

1847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점을 연 알프레드 카르티에와 아들 루아는 당시 상류계층에서 유행하던 칠보와 조금칠보 기법, 그리고 보석을 잘 조화시킨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고, 1851년부터 미국 뉴욕에서는 문방구류를 취급하던 티파니가 실용성 있는 금속공예품과 장신구·보석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티퍼니 (Charles Lewis Tiffany)

미국의 보석상

ⓒ Gryffindor / wikipedia | Public Domain

특히 다이아몬드를 사용하여 제작된 독특한 형태의 포크가 특징적이다. 19세기의 장신구는 대량생산체제가 이루어져 급성장하는 중산층을 겨냥하여 새로운 디자인 시대가 열리게 되나,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기계화와 구식의 아카데미즘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움을 겸비한 조형적인 장신구를 요구했으며 이에 부응하여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이 탄생되었다(→ 색인:아르 누보). 우아한 여성의 몸매, 몽상적인 얼굴, 백합꽃, 자연의 풍경 등을 모티프로 한 것이 이 양식의 특징이며 연속적인 곡선이 비대칭적으로 사용되어 마치 넝쿨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느낌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상아, 오팔, 바로크 진주를 즐겨 썼으며 이와 더불어 금의 합금이 다양하게 쓰였다(→ 색인:현대미술).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 장식미술전에서 유래된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은 동시대의 큐비즘이나 바우하우스 등의 영향으로 좌우대칭의 간결한 형태, 직선적인 문양의 반복이 특징이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평등사상에 따라 여성들의 의상이 활동적으로 변하게 되자 장신구의 형태 또한 간결하고 대담하며 화려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에 생활이 안정권에 들어서면서 모든 예술분야가 다양하게 개인의 감성을 표출하는 시대를 맞이했고 젊은 장신구 작가들은 장신구를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매개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독특한 예술의 한 장르로 탈바꿈했고, 이어서 유럽·미국·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미술대학에 장신구학과를 개설하고 시대감각에 맞추어 활동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새로운 세대의 장신구 예술가들에게 희망과 이상주의의 시기였다. 그들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장신구라는 매체로 표현하면서 그룹을 형성하고 전시회를 갖기 시작했다.

1970년대초부터 장신구 예술을 위한 국가간의 교류증대 및 국고지원이 있는 대규모 워크숍과 국제전시회 등이 열렸다. 1989년에는 오나멘트 1이라는 국제적인 장신구 전시회가 열리는 등 다양한 장신구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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