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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5(고종 2), 충북 충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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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 |
국적 | 일제강점기, 한국 |
요약 조선 말기의 관료.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다. 1884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단천부사·전라도수군절도사·총어영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난 뒤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친위대 제3대대장으로 있으면서 환궁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97년 민영기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친러반일적 태도를 취한 이근택은 일제의 거듭된 회유와 협박,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되어가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추진·조인하게 했고, 1905년 일제로부터 30만 원의 기밀비를 받고 궁중과 정부의 기밀사항을 정탐, 제보했다. 그해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자 앞장서 찬성했다.1910년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으로 훈1등 자작작위를 받았다.
조선 말기의 무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근용(根). 무인 집안 출신으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충주로 피난왔을 때 매일 신선한 생선을 명성황후에게 진상하여, 명성황후가 환궁한 뒤 남행선전관으로 임명되었다. 1884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단천부사·전라도수군절도사·총어영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난 뒤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세지자 친위대 제3대대장으로 있으면서 이창렬(李彰烈) 등과 모의한 후 고종이 명례궁에서 명성황후의 1주기 제사를 지내는 기회를 이용하여 환궁시키려고 했으나 이용태(李容泰)의 고발로 실패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897년 민영기의 노력으로 석방되었고, 이듬해 독립협회 해산에 공을 세워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일본 상점에서 발견한 명성황후의 허리띠를 고종에게 헌납해 총애를 받게 된 뒤 함경북도관찰사·중추원의관·헌병사령관·경위원총관 등을 지내면서 이용익(李容翊)과 함께 근황주의적(近皇主義的) 입장에서 활동했다.
그는 친러반일적 태도를 취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패퇴는 일전(一戰)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김인수(金仁洙)를 러시아에 파견하고, 차병(借兵)을 요청하는 서한도 보냈다. 그러나 일제의 거듭된 회유와 협박,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되어가자 일본의 침략정책에 협조했다. 1904년 2월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조종을 받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추진·조인하게 했다. 1905년 9월 군부대신이 되면서 일제로부터 30만 원의 기밀비를 받고 궁중과 정부의 기밀사항을 정탐,제보하여 일본의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綏章)을 받았다.
그해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자 앞장서 찬성했다. 이근택은 을사오적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원한의 표적이 되어 기산도·나인영·오기호(吳基鎬) 등이 수차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06년 4월 훈1등태극장을 받고, 그해 11월 중추원의장을 거쳐 1907년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으로 훈1등 자작작위를 받고, 미국 공채 5만 원을 받았다. 이때 형 근호(根澔), 아우 근상(根湘)도 자작작위를 받았다. 그해 10월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죽은 뒤 아들 창훈(昌薰)이 작위를 이어받았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의하면,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 의형제를 맺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의자(義子)가 되어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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