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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73(현종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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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51(영조 27)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자는 계형, 호는 회와. 아버지는 승지 이(理)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가 되었다. 1703년 소론의 영수격인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으면서 삼전도비문을 찬술한 이경석을 칭송한 반면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여 일어난 노론·소론 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관학유생이었던 그는 박세당의 문도가 송시열을 욕되게 했다고 상소했다.
170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로 있을 때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얻었다. 1712년 지평을 거쳐 정언·장령·필선·헌납·사서·집의를 역임한 뒤 1717년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었다. 1718년 광주부윤으로 있을 때 금령을 어기고 남한산성의 나무를 제멋대로 찍어서 사용했다고 파직당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충청감사·형조참판을 역임한 뒤 1722년(경종 2)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세자책봉을 승인받기 위해 청나라에 다녀왔다.
세자책봉을 허락받은 공로로 가자와 함께 노비 3구, 전(田) 10결을 하사받았으나, 자문(咨文)에서 경종을 무고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갑산부에 위리안치 되었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자 귀양에서 풀려나, 승지·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서 영조의 세자책봉과 대리청정에 관련된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뒤 병조참판·안동부사·경기감사·도승지·한성판윤·형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746년 지중추부사로서 진신(晉紳) 60여 명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여 신임사화에 관련된 소론의 뿌리를 뽑을 것을 주장했다. 1746년 봉조하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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