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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와 연합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12월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영국과 오스트리아 군대는 1743년 6월 바이에른의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1745년 1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바이에른을 반환하는 대가로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은 프로이센이 1745년 12월 드레스덴 조약으로 슐레지엔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고 일단락되었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1748년 10월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과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을 다시 확증했다.
이 중에 2차례의 전쟁은 1740년 10월 20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사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는 바이에른과 작센, 그리고 스페인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에 대해 분명하지 않은 소유권을 주장한 데 대해 지지를 보냈으며 또한 바이에른 선제후인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황제 계승권을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지지를 표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이같은 태도는 유럽 대륙에서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를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데 전체적인 목적이 있었다. 프랑스와 연합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2차 슐레지엔 전쟁 때 오스트리아로부터 슐레지엔을 빼앗고 이를 계속 장악했다.
이와 함께 인도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도 계속되었다(→ 젱킨스의 귀전쟁, 조지 왕 전쟁).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1740년 12월 16일 합스부르크 영토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지역인 슐레지엔을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이듬해 4월 몰비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을 유린했다(몰비츠 전투). 프리드리히가 승리를 거두자 전유럽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따라서 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후 1개월 만에 프랑스의 벨릴 백작(나중에 육군원수및 공작) 샤를 오귀스트 루케는 바이에른 및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으며 나중에는 작센·프로이센과도 동맹을 맺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주요지원세력은 영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영국의 식민지 상업 제국이 위협받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689~1815년 지속된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다툼의 한 국면을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바이에른 동맹군의 오스트리아 및 보헤미아 침공은 군사력의 취약성과 전쟁목표의 통일성 부족으로 실패했다. 오스트리아는 1742년 7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을 허용함으로써 잠시나마 프로이센이 중립 입장에 서도록 만들었다. 또 같은 해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를 보헤미아에서 축출하고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은 영국과 하노버 및 헤센의 군대는 1743년 6월 27일 바이에른의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그해 9월 사보이 왕국이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으며 프랑스인은 철수했다. 1745년 1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대표적 인물인 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바이에른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바이에른을 반환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로 선출하는 데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제 프리드리히는 갈수록 세력이 확대되어가는 오스트리아를 두려워하는 형편이 되었으며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1744~45)은 1745년 12월 드레스덴 조약으로 일단락되었는데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프랑스가 마지막으로 거둔 주요성과는 육군원수 모리스 드 삭스가 1745년 5월 11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대단한 승리를 거둔 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점령(1745~46)한 것이었다.
전쟁은 1746~48년 분명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영국 군대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 찰스 에드워드가 영국의 왕위복위를 시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마침내 열강들은 재정 부담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 모여들었다. 1748년 10월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과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을 다시 확증했다(엑스라샤펠 조약). 한편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분규와 그밖의 갈등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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