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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

다른 표기 언어 오닐 , Eugene (Gladstone) O'Neill 동의어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 Eugene Gladstone O'Neill
요약 테이블
출생 1888. 10. 16, 뉴욕 시
사망 1953. 11. 27, 보스턴
국적 미국

요약 미국 최고의 극작가. 193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 〈안나 크리스티〉, 〈얼음장수의 왕림〉 등이 있다.

목차

  1. 초기생애
  2. 연극 입문
  3. 전성기
오닐(Eugene O'Neill)

미국의 극작가

ⓒ Alice Boughton / wikipedia | Public Domain

〈지평선 너머 Beyond the Horizon〉(1920)·〈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22)·〈기묘한 막간극 Strange Interlude〉(1928)·〈아아! 황야 Ah! Wilderness〉(1933)·〈얼음장수 오다 The Iceman Cometh〉(1946) 등의 걸작에 이어서 그의 작품 세계는 사후에 제작된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1956)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초기생애

오닐은 연극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오닐은 19세기말 몇십 년 간 유랑극단의 유명한 배우였는데, 그가 맡은 배역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알렉상드르 뒤마 1세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 역이었다. 그의 어머니 엘라는 첫아들 제임스 2세와 유진의 출생을 위해 잠시 정착했을 뿐 남편을 따라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오닐은 호텔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호텔방, 열차, 무대 뒤에서 보냈다. 비록 그가 나중에 어린시절의 악몽 같은 불안감을 한탄하고 어머니를 마약중독자로 몰아넣었던 고달픈 마구잡이 인생 때문에 아버지를 비난하긴 했지만, 오닐에게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연극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가 신봉했던 농민 중심의 아일랜드 가톨릭교와, 좀더 우아하고 신비로운 어머니의 신앙심에 깊이 빠져들었다. 가끔 극적 갈등을 일으키는 이 2가지 서로 다른 영향은 오닐의 희곡을 특징짓는 신과 종교와의 투쟁, 그리고 고도의 극적 감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밝히는 데 근거가 된다.

오닐은 브롱스의 마운트세인트빈센트와 코네티컷 주 스탐퍼드의 베츠 아카데미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코네티컷 주 뉴런던의 템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수수한 집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그 집은 오닐의 가족들에게는 유일한 정착지였다. 프린스턴대학교를 1년간(1906~07) 다니다 중퇴한 후, 그가 뒤에 진정한 교육이었다고 말한 바 있는 '인생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뒤 6년간 그는 죽음을 마주하고 살았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리버풀, 뉴욕 시의 선창에서 부랑자생활을 했고, 술독에 빠져 살다시피 했으며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24세 때 잠시 건강을 되찾아 〈뉴런던 텔레그래프 New London Telegraph〉의 기자 겸 시(詩)란의 기고가로 일했으나, 얼마 안 되어 결핵에 걸렸다. 6개월간(1912~13) 코네티컷 주 월링퍼드의 게일로드 팜 요양소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직면했으며, 그가 나중에 '거듭남'이라고 일컬었던 체험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희곡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극 입문

오닐의 첫 작품은 미숙한 멜로드라마였으나, 이 작품은 그 당시만 해도 심각한 소설의 범주에 속하여 미국의 연극무대에 올리기에는 적합지 않게 여겨졌던 인물과 주제, 즉 매춘부, 부랑자, 외로운 선원 및 인간에 대한 신(神)의 부당성을 다루고 있었다.

어느 연극평론가가 오닐을 하버드대학교에 보내 조지 피어스 베이커의 유명한 희곡작법 강좌를 듣게 하라고 그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비록 이 기간(1914~15)에 쓴 오닐의 작품이 베이커의 학문적 가르침의 영향을 거의 받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그가 선택한 길을 확고히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닐은 1916년 여름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조용한 어촌에서 극작가로서 등단했는데, 당시 그곳에서는 젊은 작가·화가 들이 실험극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프로빈스타운 극단). 그들은 부두에 있는 쓰러질 듯한 조그마한 극장에서 오닐의 단막 해양극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 Bound East for Cardiff〉를 공연했다.

프로빈스타운 극단(Provincetown Players)

새로운 실험극의 상연을 목표로 하는 작가, 예술가들이 미국 프로빈스타운에 설립한 극단. 당시 극단 모습

ⓒ Carl Van Vechten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들은 작품 속에 내재한 오닐의 재능을 즉시 발견했으며, 그해 가을 그리니치빌리지에서 '극작가들의 극단'(The Playwrights' Theater)을 결성했다. 그들이 1916년 11월 3일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를 포함한 작품으로 첫 공연을 함으로써 오닐의 뉴욕 데뷔가 이루어졌다. 오닐은 그 극단이 공연한 작품들을 썼던 여러 극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후 몇 년 간 그가 기여한 덕택에 이 극단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16~20년 '극작가들의 극단'은 오닐의 단막 해양극 전부와 이보다 정성을 덜 쏟은 많은 작품들을 공연했다. 1920년 2월 2일 브로드웨이에 있는 모로스코 극장에서 그의 첫 장편극 〈지평선 너머〉가 공연되었을 때 이미 이 젊은 극작가는 약간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는 그 속에 담긴 비극적 사실주의로 비평가들을 감동시켰으며, 그에게 희곡 부문의 퓰리처상을 처음으로 안겨주었고, 연극 대중이 좀더 광범위한 관심을 그에게 쏟게 만들었다.

오닐은 이 작품 외에도 〈안나 크리스티〉·〈기묘한 막간극〉·〈밤으로의 긴 여로〉 등으로 모두 4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뒤 20년간 그는 미국과 해외에서 꾸준히 명성을 얻어 셰익스피어와 쇼 이래 가장 널리 번역되고 공연된 작품을 쓴 극작가가 되었다.

전성기

오닐의 작품에 대한 재능과 작품에 몰두하는 자세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는 1920~43년에 분량이 다른 것의 2, 3배 되는 몇몇 작품을 포함하여 20편의 장편극과 수많은 중편·단편 극을 썼다. 그는 마음에 들 때까지 상당수의 원고를 수없이 고쳐 썼으며 연구기록, 작품개요, 극의 착상에 관한 메모로 가득 찬 작업 노트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만들어놓았다. 유명한 단편극으로는 1913~17년에 씌어져 1924년 〈S. S. Glencairn〉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4편의 초기 해양극 〈카디프를 향하여 동쪽으로〉·〈In the Zone〉·〈고향으로 가는 긴 항해 The Long Voyage Home〉·〈캐러비스의 달 The Moon of the Caribbees〉, 열대섬의 독재자가 된, 특별객차 흑인 급사의 몰락을 그린 〈황제 존스 The Emperor Jones〉, 파면당한 증기선 석탄화부의 몰락을 그린 〈털복숭이 원숭이 The Hairy Ape〉 등이 있다.

오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썼다.

그의 희곡은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관계가 빚은 고통스러운 결과, 즉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고통을 주었던 어머니와 아버지, 오닐을 사랑했지만 타락시켰고 중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삶을 마감했던 형, 아울러 이들 3명에 대한 사랑과 분노에 사로잡혀 고뇌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직접 소재를 얻었던 것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장편극 중 하나인 〈안나 크리스티〉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매춘부'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룬 고전적인 미국 작품의 한 실례라 할 수 있는데, 공연 즉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예전의 강요에 의한 매춘생활을 잊고, 사무적이지만 마음에 드는 젊은 선원과 행복하게 살려는 가난한 스웨덴계 미국 소녀의 투쟁을 진지하고 장엄하게 다룬 이 작품은 오닐의 비극 가운데 가장 단순한 작품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작품은 '너무 평이해서' 그 자신은 탈고하는 순간부터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오닐이 자신의 삶 속에서 느꼈던 그리스 비극의 황량함과 필연성을 훌륭하게 그려낸 첫 장편극은 〈느릅나무 그늘 밑의 욕망 Desire Under the Elms〉이었다.

그는 근친상간, 유아살해, 숙명적 보복이라는 그리스 비극의 주제를 끌어내어 자기 가족의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를 구성해냈다. 호색가인 아버지와 허약한 아들, 어린 아들을 살해하는 부정한 아내를 다룬 이 작품은 그당시 브로드웨이 연극의 관례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고 평가되었다. 간결한 문체의 이 작품은 멜로드라마 요소를 탈피하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공연되자마자 호소력이 넘치는 비극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희곡 가운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오닐은 〈위대한 신 브라운 The Great God Brown〉에서 후기 작품들 속에서 그가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했던 중요한 주제, 즉 이상주의와 물질주의 사이의 갈등을 다루었다.

이 작품은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난해하여 1926년 공연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가면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표현주의적 대사와 연기를 실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오닐의 시도는 그뒤 연극·영화 모두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구성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대담한 기법과 상징적 표현, 그리고 시적 감흥이 풍부하여 미국 전위연극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오닐의 혁신적 작법은 〈기묘한 막간극〉에서도 계속되었는데, 이 작품은 문체와 길이에서 혁명적이었다.

첫 공연은, 늦은 오후에 시작되어 저녁식사를 위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보통 막을 내리는 시간에 끝났다. 등장인물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방백이나 독백 등 현대극에는 생소한 기법이 동원되었다. 이 작품은 딸, 아내, 정부(情婦), 어머니, 정신적인 벗의 역할을 의식적(儀式的)으로 해내는 평범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1928년 당시 깜짝 놀랄 만큼 혁신적이었으나 프로이트적인 암시가 명백한 이 작품은 얼마 못 가 시대에 뒤진 것이 되고 말았다.

오닐의 불후의 명작 중 하나인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Mourning Becomes Electra〉는 작가가 그리스극의 형식·주제·등장인물 등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 Oresteia〉를 바탕으로 씌어진 것으로 역시 3부작으로 구성되었다. 오닐은 시대적 현실감각을 살피기 위해 작품의 배경을 남북전쟁 기간의 뉴잉글랜드로 설정했으나 그리스극의 형식과 등장인물들, 즉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영웅적인 지도자, 그를 죽이는 부정한 아내,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질투심 많고 욕망을 억제당한 딸,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누이의 부추김을 받아 어머니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유약한 아들과, 그들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작품에 반영했다.

비극적 세계를 그린 일련의 성공작들에 이어 오닐의 유일한 희극 〈아아! 황야〉가 1933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향수에 젖은 분위기에서 쓴 이 작품은 작가가 인생의 비극적 측면뿐만 아니라 희극적 측면도 묘사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어느 정도 장난기 어린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후기의 걸작인 비극 〈밤으로의 긴 여로〉와 마찬가지로 1900년대초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격심해지는 고통을 다룬 〈아아! 황야〉에 대해 오닐은 '동전의 이면'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자신의 청년기(후에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극화한 것과 마찬가지로)가 실제로 그러했다고 믿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가상을 그렸음을 의미한다.

가장 까다롭고, 아마도 그의 비극작품 중 가장 탁월한 작품인 〈얼음장수 오다〉는 1939년에 씌어졌으나 1946년에야 비로소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미묘한 종교적 상징주의가 가미된 이 작품은 자신을 속여서라도 더 나은 생활에 대한 희망에 집착할 필요를 느끼는 인간을 탐구하고 있다.

오닐은 마지막 작품에서까지 계속 자신의 어린시절에 관심을 쏟았다. 그의 사후에 공연되었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고통스럽게 드러낸 작품으로, 오닐의 최대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의 문체는 직선적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아들의 괴로운 관계를 혼란스러울 정도로 아주 복잡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루 동안 전개되는 가족의 생활을 그린 이 작품은 좌절한 마약중독자 어머니, 사회생활에 실패하고 남편과 아버지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아버지, 심한 알코올 중독자인 큰 아들, 육체적·정신적 생존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만을 안고 있지만 인생에 환멸감을 느끼는 결핵환자인 작은 아들 등 중심인물의 내면을 한겹한겹 탐색해 들어가고 있다.

오닐의 비극적 인생관은 결혼했던 3명의 여인(물론 이들 중 둘과는 이혼했음)을 포함해서 세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굳어졌다.

첫번째 아내 캐슬린 젠킨스가 낳은 장남인 유진 오닐 2세는 40세에 자살했고, 2번째 아내 애그니스 볼턴이 낳은 둘째 아들 셰인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에 빠져들었다. 역시 애그니스 볼턴이 낳은 오나는 18세 때 오닐과 동년배인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서 그를 격노케 했으며, 그후 오나와 부녀관계를 끊었다.

1953년 작고한 뒤에도 한동안 미국에서 존경을 받았으나 해외에서 더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언제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것은 널리 알려졌듯이 오닐이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스트린드베리의 비극적 주제는 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났다. 1936년 스웨덴 아카데미는 미국 극작가로서는 최초로 오닐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연극을 위해 시도했던, 오닐의 가장 야심적인 계획은 결코 완결되지 못했다.

1930년대말 그는 11일 밤을 연속 공연하기 위한 11편의 순환극을 구상했는데, 그것은 1800년대초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 미국인 가정의 삶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편의 시나리오와 희곡의 개요를 썼고 다른 희곡 몇 편의 초고를 작성했으나, 병으로 손이 부자유스러워 펜을 잡을 수 없게 되기까지 순환극 중 〈시인 기질 A Touch of the Poet〉 단 1편만을 완성했다. 순환극 중 미완성 초고 〈보다 더 웅장한 저택 More Stately Mansions〉은, 자신의 사후에 완성되지 않은 원고는 폐기하라는 오닐의 지시문에도 불구하고, 1964년 출판되어 3년 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오닐은 깊은 좌절감 속에서 만년을 보냈다.

작업이 불가능해지자 보스턴 호텔에서 의사·간호사와 3번째 부인 칼로타 몬트레이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앉아서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닐은 무대를 위해 자신이 창조해냈던 실의에 빠진 비극의 인물처럼 세상을 떠났다. 오닐의 노력으로 1920년대 미국 연극은 미국 최고의 소설·그림·음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문화적 수단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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