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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50(세종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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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69(예종 1) |
국적 | 조선, 한국 |
종교 | 유교(성리학) |
재위 | 1468년∼1469년 |
시호 | 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
능묘 | 창릉(昌陵) |
요약 조선 제 8대 왕이자 세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 또는 평남. 세조의 병환이 깊어지자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이의 옥 사건이 발발해 적개공신 세력들이 제거되는 한편,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세력의 권세가 더욱 높아졌다.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이 완성되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병환으로 인해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조선의 제8대 왕. 이름은 황(晄), 초자는 평보(平甫), 자는 명조(明照)·평남(平南)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파평부원군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이며, 계비는 우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이다.
일찍이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1457년(세조 3) 9월 왕세자 장(暲, 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66년부터 승명대리로 정무를 보아오다 1468년 9월 세조가 죽기 직전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조말부터 신숙주·한명회·정인지·구치관 등의 훈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근무하면서 정무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고, 예종 즉위 후에는 이들 전직 대신들이 원상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상 세력과, 이시애(李施愛)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강순·남이·구성군 등 적개공신 간의 권력다툼이 노골화되었고, 그해 10월 적개공신 세력이 남이의 옥 사건으로 제거되었다. 이후 원상 세력은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봉되어 80~150결의 공신전을 받았으며, 특히 한명회는 영의정이자 국구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다.
1469년 3월 삼포의 사무역을 금했으며, 6월에는 일반 농민이 둔전을 경작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해 9월에는 문민질고별감을 경상도·충청도·전라도에 각각 보내 민란을 진정시켰다. 문화면에서는 1469년 6월 세계지도인 <천하도>를 작성했고, 7월 조선초부터의 내우외환을 기록한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완성했다. 9월에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 등이 <경국대전>을 완성했으나 반포를 보지 못했다.
14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하고 20세로 죽어 덕종의 둘째 아들 잘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했다.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창릉이다. 시호는 양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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