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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고종 6), 평북 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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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3. 1. 17, 평북 선천 |
국적 | 한말, 한국 |
호 | 격헌(格軒) |
요약 목사·독립운동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호는 격헌. 1895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했으며 1897년 예수교장로회 전도사가 되었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한국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에 부임했다.
목사로 일하면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등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하고, 양로원·고아원 등을 세웠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풀려났다. 출옥 후 1914년 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1916년 총회장이 되는 등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1918년말부터 이승훈(李昇薰)·이명룡(李明龍)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던 중 1919년 2월 밀입국한 상하이[上海] 교포 대표 선우혁(鮮于爀)과 만난 후 평양에서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그리스도교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숭실전문학교 등 그리스도교계 학생의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이때 서울에서 천도교측이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제기하자 여기에 참여하기로 하고 이승훈·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3·1운동에 그리스도교계를 참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월 23일 평양의 교회에서 함태영을 만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기 위하여 도장을 맡기고, 2월 28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한용운(韓龍雲)의 간단한 식사를 듣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생을 전도사업에 전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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