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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

다른 표기 언어 藥令市

요약 조선 후기에 약재를 취급했던 특수한 시장의 하나.

특히 대구의 약령시는 매우 유명했다. 17세기 후반기 이후 약령시는 의약학의 발달과 약재수요의 증가 등 여러 요인으로 현격하게 발전했다. 조선 초기 약재 생산은 주로 채취에 의존했으나 때로는 재배도 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각 지방에 채약인이 있어 적당한 시기에 약을 채약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채약인은 약한으로도 불리는데, 이들은 채약만을 대대로 했기 때문에 채약시기나 방법·건조·손질·관리기법 등을 알고 있었고 그 숫자도 전국적으로 상당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재재배는 세종 때 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의 4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종류도 77종이나 되었는데, 그중 경상도가 32종으로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대구의 약령시 발전과 관련이 있다.

경상도에서만 재배되는 약종은 적소두·두화·대맥·청대호위·호로·만청자·상륙 등 8종으로 강원도와 황해도의 각 3종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약재재배의 현황은 약재생산의 총 가지수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각 도에서 생산된 약재는 총 1,080가지로 317종에 이른다. 그중 세종 때를 기준으로 보면 경상도의 총 약재 종수는 170종으로 전체의 56.2%에 달한다. 이러한 경상도의 약재재배와 공물납부는 대구의 약령시를 발흥시킨 주요요인이었다.

그런데 1608년(광해군 즉위)에 경기도부터 대동법(공납을 쌀로 대납하는 제도)을 실시하자 왕실의 사용품도 점차 값을 치르고 사오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물품을 사기 위해 1653년(효종 4)부터 궁궐에 특별히 개설된 궁시를 열게 되었다. 이 방식은 약령시 설치방식으로 원용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들어서면 약재진상도 혼선을 빚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충청도의 약재진상은 대동법 실시와 동시에 진상을 담당하는 공인들이 맡으면서 품질도 떨어지고 채약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진상제도의 부활이 논의되는 사이에 많은 양의 진상약이 경상도로 전가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경상도에서 대동법이 아직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종연간 경상도에서는 한 해에 적어도 337.3근의 약재를 진상했는데, 봄·가을에 가장 많았다. 이 사실은 후일 약령시의 설치 시기와 일치된다. 그러나 많은 공납량으로 경상도 약재의 질이 떨어져, 1658년(효종 9)에 약재 중 청대죽이 불완전품이라는 이유로 당시 경상도 감사였던 임의백이 문책당했다. 같은 해 임의백은 최우량품을 조달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궁궐에 설치한 궁시를 본떠 경상도 감영(감사가 행정을 맡아 보던 곳) 내의 객사에 영시를 개설했다. 이것이 대구 약령시의 출발로 이후 영시로 변환하여 1년에 2회에 걸쳐 시장을 열게 했다. 즉 일종의 계절적인 특수시장으로 약재 수요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후 약령시는 사회적·경제적 추세에 따라 발전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구 이외에 원주·전주·공주·진주·청주·대전·개성·제천에서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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