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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 부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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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68,590명 (2024년 추계) |
면적 | 160.85㎢ |
언어 | 독일어 |
대륙 | 유럽 |
국가 | 독일 |
요약
서쪽으로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한다. 로마시대에 아쿠이스그라눔이라는 온천지였으며, 8세기에 카를 대제가 즐겨 머무르면서 제국 제2의 도시이자 서구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250년경 자유제국도시가 되었다. 빈 회의 이후 프로이센으로 넘어갔고 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연합군에게 함락된 첫 번째 대도시이다.
장크트포일란·장크트파울·장크트니콜라스와 같은 유명한 중세시대의 교회들과 주에르몬트 미술박물관과 시장 광장의 카를 대제 동상 위에 있는 분수 등이 주요유물이다. 이곳의 유황온천들을 찾는 사람이 많다. 철도 중심지이며 석탄채굴지역의 공업·상업 중심지이다.
서쪽으로 벨기에 및 네덜란드와 접한다. 아쿠이스그라눔이라는 로마 시대의 온천지역이었으며, 8세기에 카를 대제가 이곳에 즐겨 머무르면서 중요해져 그의 제국 제2의 도시이자 서구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936년 오토 1세의 즉위 이후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독일 왕들은 이곳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12세기 후반에 요새화되었고 1166, 1215년에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며, 1250년경 자유제국도시가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근처에 프랑스 국경이 있어 불안정한 위치라는 점과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부에서 너무 멀다는 점 때문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1562년 대관식 장소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졌다. 상속전쟁(1668)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8)을 끝맺는 평화회담을 포함하여 몇 차례의 평화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곳은 1794년 프랑스에 점령되어 1801년에 합병되었으며, 빈 회의(1814~15) 이후 프로이센으로 넘어갔다. 1818년 조인된 엑스라샤펠 회의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문제를 조정한 회의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벨기에가 점령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 심하게 파괴되었다가 1944년 10월 20일 독일의 대도시로서는 최초로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장크트포일란·장크트파울·장크트니콜라스와 같은 유명한 중세시대의 교회들은 제2차 세계대전중 파괴되거나 심한 손상을 입었으나 많이 복구되었다. 1530년경 카를 대제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 건축되었으며, 웅장한 황제 회당이 있는 시청은 복구되었다. 성당은 비교적 손상을 입지 않았다.
성당은 뚜렷하게 2가지 양식으로 구분되는데, 790~805년에 지은 것으로 라벤나에 있는 장크트비탈레 성당을 모방한 카를 궁전 예배당은 카롤링거 왕조시대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1355년경의 성가대석은 고딕 양식이다. 예배당 주위의 회랑에는 대리석으로 된 황제의 의자가 있는데, 이 의자는 대관식용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카를 대제의 무덤은 1168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선물한 청동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석조단이 특색을 이룬다. 많은 보물을 소장한 성당 보물창고에는 중세의 훌륭한 세공품과 약 7년에 1번씩 순례자들에게 전시되는 성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다른 주목할 만한 유물로는 주에르몬트 미술박물관과 시장 광장의 카를 대제 동상 위에 있는 분수를 꼽을 수 있다.
아헨 국제언론박물관에서는 16세기부터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1870년에 설립된 라인베스트팔렌공과대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교육기관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유황온천들을 찾는데, 부르트샤이트 외곽에 있는 슈베르트바트쿠엘레는 독일에서 가장 뜨거운(76℃) 온천이다. 철도 중심지이며 석탄채굴지역의 공업·상업 중심지이다. 철강업계의 거의 모든 분야업체가 인근 지역에서 가동되고 있다. 다른 생산품으로는 섬유·가구·유리·기계·바늘·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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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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