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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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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스페인의 선사시대
  2. 스페인의 초기식민시대
  3. 스페인의 로마 지배
  4. 서고트족 왕국
  5. 이슬람의 지배시절의 스페인
  6.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역사
    1. 개요
    2.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
    3. 나바라 왕국과 중세 스페인 제국
    4. 아라곤 왕국의 융성
    5. 카스티야레온 왕국(1252~1479)
    6. 아라곤-카탈루냐 왕국(1276~1479)
  7.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8. 합스부르크 왕조
  9. 부르봉 왕조
  10. 후기 부르봉 왕조
  11. 스페인 제2공화국
  12. 현대의 스페인
스페인의 국장

ⓒ SanchoPanzaXXI/wikipedia | Public Domain

스페인은 기원전부터 그리스·로마인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8세기 이후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을 벌여 15세기말에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과 더불어 유럽인이 세계적 진출에 나설 무렵에는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 거대한 식민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국력이 차츰 쇠하여 부르봉 왕조의 지배와 나폴레옹 1세의 정복을 겪었다. 그뒤 독립운동과 혁명, 내란을 거쳐 1939년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통령으로 하는 파시즘 정체가 성립하여 지속되다가 1975년에 군주제가 부활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갈리시아 왕국[739~]과 레온 왕국[855~] 포함)
펠라요 718경~737경
파빌라 737경~739
알폰소 1세 739~757
프루엘라 1세 757~768
아우렐리오 768~774
실로 774~783
마우레가토 783~788
베르무도 1세 788~791
알폰소 2세 791~842
라미로 1세 842~850
오르도뇨 1세 850~866
알폰소 3세(아들들에 의해 3개 왕국으로 갈라짐) 866~910
아스투리아스 왕국
프루엘라 2세 910~925
레온 왕국
가르시아 1세 910~914
오르도뇨 2세 914~924
갈리시아 왕국
오르도뇨 2세 910~924
레온 왕국(아스투리아스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 포함)
프루엘라 2세 924~925
알폰소 4세 925경~931경
라미로 2세 931경~950
오르도뇨 3세 950~955
산초 1세 955~958
오르도뇨 4세 958~960
산초 1세(복위) 960~966
라미로 3세 967~982
베르무도 2세 982~999
알폰소 5세 999~1028
베르무도 3세 1028~37
레온-카스티야 왕국
페르난도 1세(아들들에 의해 3개 왕국으로 갈라짐) 1039~65
레온 왕국
알폰소 6세 1065~72
카스티야 왕국
산초 2세 1065~72
갈리시아 왕국
가르시아 2세 1065~71
카스티야-레온 왕국(갈리시아 왕국 포함)
산초 2세 1072
알폰소 6세(복위) 1072~1109
우라카 (남편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와 공동통치) 1109~26
알폰소 7세(아들들에 의해 2개 왕국으로 갈라짐) 1126~57
레온 왕국
페르난도 2세 1157~88
알폰소 9세 1188~1230
카스티야 왕국
산초 3세 1157~58
알폰소 8세 1158~1214
엔리케 1세 1214~17
페르난도 3세 1217~52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 포함)
알폰소 10세 1252~84
산초 4세 1284~96
페르난도 4세 1296~1312
알폰소 11세 1312~50
페드로 1세 1350~66
엔리케 2세 1366~67
페드로 1세(복위) 1367~69
엔리케 2세(복위) 1369~79
후안 1세 1379~90
엔리케 3세 1390~1406
후안 2세 1406~54
엔리케 4세 1454~74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1474~1504
후아나와 펠리페 1세 1504~06
페르난도 5세(복위) 1506~16
아라곤 왕국
라미로 1세 1035~63
산초 1세 1063~94
페드로 1세 1094~1104
알폰소 1세 1104~34
라미로 2세 1134~37
페트로니야 (남편 바르셀로나의 라몬 베렝게르 4세와 공동통치) 1137~63
알폰소 2세 1163~96
페드로 2세 1196~1213
하이메 1세 1213~76
페드로 3세 1276~85
알폰소 3세 1285~91
하이메 2세 1291~1327
알폰소 4세 1327~36
페드로 4세 1336~87
후안 1세 1387~95
마르틴 1395~1412
페르난도 1세 1412~16
알폰소 5세 1416~58
후안 2세 1458~79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1479~1504) 1479~1516
스페인 왕국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로스 1세 1516~56
펠리페 2세 1556~98
펠리페 3세 1598~1621
펠리페 4세 1621~65
카를로스 2세 1665~1700
부르봉 왕가
펠리페 5세 1700~24
루이스 1724
펠리페 5세(복위) 1724~46
페르난도 6세 1746~59
카를로스 3세 1759~88
카를로스 4세 1788~1808
페르난도 7세 1808
보나파르트 왕가
호세(조제프 보나파르트) 1808~13
부르봉 왕가
페르난도 7세(복위) 1814~33
이사벨 2세 1833~68
공위기간(空位期間) 1868~70
사보이 왕가
아마데오 1세 1870~73
공화국 1873~74
부르봉 왕가
알폰소 12세 1874~85
알폰소 13세 1886~1931
공화국 1931~39
파시스트 정권(프란시스코 프랑코) 1939~75
부르봉 왕가
후안 카를로스 1975~
스페인의 역대 통치자

스페인의 선사시대

이베리아 반도에 인간이 최초로 정착한 시기는 2만 년 전으로 추정되나, 이들은 빙하시대 때 사라졌다. 확인할 수 있는 인간 최초의 발자취는 동굴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산탄데르 서쪽에 있는 BC 15000년경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이다.

엘 아르가르 농경문화는 BC 2000경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야금기술이 발달했다. BC 1000년에 들어서면서 타르테소스족이 융성하면서 스페인은 역사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 관한 언급은 그리스·로마 문헌과 성서에 나와 있다. 그들은 고유문자 체계와 뛰어난 청동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BC 900년경부터 페레네 이북의 켈트족이 스페인에 몰려들어왔다. 이들이 가지고 온 철기문화인 할슈타트 문화는 스페인 전역에 확대되었고, 기존의 이베리아인과 혼혈하여 갈색 피부와 흑색 머리칼이 특징인 켈트이베리아족이 형성되었다.

스페인의 초기식민시대

BC 7~6세기에 걸쳐 스페인은 동남부와 서남부의 풍부한 광업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타르테소스 및 페니키아와 교역했다. BC 7세기 과달키비르 강 유역은 투르데타니라 불리는 이베리아인에게 점령당했다. 그리스인은 BC 7세기 중기부터 BC 6세기 후기까지 동스페인과 교류했으며 이오니아의 포카이아인은 이베리아 반도의 동해안에 상업식민시를 건설했다.

포카이아인은 BC 600년경 마실리아(마르세유)를 세우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최초의 항구적인 그리스 식민시를 엠포리아이(암푸리아스)에 설립했다. 포카이아인의 남부 식민시는 카르타고인의 손에 넘어갔으나 엠포리아이는 로마가 점령하기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BC 520년경에는 페니키아인의 식민시가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들어가 철광석과 용병의 공급처가 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 후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카디스를 비롯한 몇몇 연안식민지에서 카르타고의 지배를 넓혔다. BC 218년 한니발의 스페인 동부 사군툼(사군토)의 공격이 빌미가 되어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로마 지배

로마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에 승리함으로써 두 속주를 획득했다. 로마는 속주에 총독을 두었으며 아프리카 내륙으로 속주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해마다 많은 병력과 전비를 투입했다. BC 133년에는 누만티아를 점령하고 북부와 서부로 진출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61~60년 점령지를 더욱 확대하고 독재관(dictator)으로서 새로운 식민 도시정책을 시작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 Grandiose/wikipedia | CC BY-SA 3.0

그는 이탈리아인을 스페인(히스파니아)으로 이주시키고 몇몇 스페인 원주민 공동체에도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이리하여 스페인 주민은 로마인으로서 정치의식에 눈뜨게 되어 그들의 언어·종교·생활은 그 이후 로마를 모범으로 형성·통일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최초의 과제였던 스페인 북서부 정복은 BC 19년에 달성되었으며 이로써 스페인은 전면적으로 재편성되었다.

로마의 거점으로 세워진 식민시(colonia)와 완전한 자유시(municipia)는 자치적이며 시민세를 부과하는 정도였으나, 다른 비특권시는 속주 총독이 통치하면서 중앙에 공물을 바쳤다.

베스파시아누스(AD 69~79 재위)는 통치기간중에 350개 도시에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스페인은 이무렵이 황금기로서 고도의 다양한 문화를 누렸다. 그러나 3, 4세기에는 문화의 주도권을 잃고 406~407년 반달족이 라인 강 국경을 넘어 갈리아·스페인에 밀려들어왔을 때 이에 저항할 용기도 회복할 희망도 갖지 못했다. 409년 반달족의 침입과 함께 스페인은 오랜 분열과 혼란의 시기에 돌입했다.

반달족과 그 동맹자 수에비족과 알라니족은 선주민을 압도할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았으며 429년에는 북아프리카로 이동했다. 스페인은 로마의 관습법이나 자치시, 그리스도 교회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로마 지배 전의 혼란상태에 빠졌다. 서고트족이 스페인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로마는 스페인 회복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552년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서고트족의 왕위계승 분쟁에 개입해 출병하고 스페인 남안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게르만족).

서고트족 왕국

남갈리아의 아키텐에 있던 서고트족의 지배자는 5세기초부터 스페인의 여러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나 스페인으로 대이동해온 것은 494년이었다. 20만 명의 이주자 가운데는 농민·전사(戰士)·성직자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별 저항 없이 지배권을 확립했다(497). 서고트 왕국의 수도는 아타나길드 시대에 갈리아로부터 톨레도로 옮겼다. 서고트족은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히스파노(이스파노)로마인과의 통혼은 금지되었다.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은 불안정 상태인데다 귀족이 왕의 선출 원칙을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왕위는 언제나 정치적 음모로부터 위협받고 있었다. 그러나 레오비길드 왕(568~586 재위)은 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수에비족 게르만 왕국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반란상태에 있던 바스크인을 제압했으며, 아리우스파에 반항하는 가톨릭교도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어 레카레도 왕(586~601 재위)은 즉위하자 가톨릭의 세례를 받고 589년 가톨릭을 왕국의 국교로 선언했다.

종교상의 경계가 무너지자 서고트족과 히스파노로마인과의 동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가 왕위를 지배해 시세난도 왕(631~636 재위) 시대에는 국왕과 정부는 성직자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다. 레케스윈트 왕(649~672 재위)은 게르만 관습법을 기준으로 한 재판법전(Liber judiciorum)을 공포하고 두 민족의 유일한 법전으로 선포했다. 서고트 왕국의 사회제도는 귀족·성직자의 귀족계급, 혼혈종족의 자유민계급, 다수의 노예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은 총독(duces) 또는 대리관(comites)이 지배하고 있었다. 명확한 정치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 계급사회는 서고트가 지배하던 2세기 동안 어떤 민족적 통일도 이룩하지 못했다.

이슬람의 지배시절의 스페인

서고트의 위티사 왕(700~710 재위) 시대에 칼리프의 아랍군이 북모로코를 정복하고 711년 7월 베르베르족이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래, 수도 톨레도를 비롯하여 세비야·메리다·사라고사·레온·갈리시아·포르투갈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했다. 서고트족은 대체로 저항다운 저항을 받지 않았다. 서고트의 호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자 공납을 조건으로 하여 넓은 영지를 허락받았다. 유대인은 박해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이슬람교도의 열렬한 동맹자가 되었고, 농노도 일정한 자유를 얻었다. 아랍인은 끊임없이 이주해왔지만 전국토를 식민지화하기에는 너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행정적·군사적 조직을 구축하고 봉토를 할당해 체제를 유지해나갔다.

755년 우마이야 왕조아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스페인에 상륙하여 756년 코르도바를 점령해 스페인의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다. 이 왕조는 아브드 알 라흐만 2세(822~852 재위)의 치세에 이르러 경제적·문화적 번영의 기초를 세웠다. 무하마드 1세(852~886 재위) 때에는 스페인인 개종자(muwallad)와 베르베르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평화는 또다시 깨어졌다.

아브드알라(압둘라)의 손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912~961 재위)는 확고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로서, 왕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고 권력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10년 안에 이슬람 왕국을 재통일하고 929년에는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했다. 그러나 1009년경 슬라보니아인과 베르베르족이 연달아 코르도바를 점령하고 그밖의 이슬람 왕국도 우마이야 왕조에 등을 돌려 이슬람 사회는 소왕국인 타이파(tā⁾ifa)로 분열했다. 이들은 아랍인 타이파, 베르베르족 타이파, 노예집단 타이파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이런 내부 분열은 북부에 있는 가톨릭 왕국들의 영토확장을 용이하게 했다. 결국 톨레도 함락 후 이슬람교도들은 알모라비데족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한 알리 이븐 유수프(1106~43)의 지휘로 이슬람 세력은 사라고사까지 점령했으나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와 그의 양아들인 카스티야 왕 알폰소 7세의 저항으로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그리스도교 역사

개요

711~1479년의 그리스도교 스페인 역사에는 상호작용하는 2개의 상반된 개념이 존재했다.

첫째는, 그리스도교도가 전 반도를 최종적으로 정복할 것이라는 개념이고, 둘째는, 스페인의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역사적·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종교적 감정이나 스페인 통일에 대한 서고트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한 것으로 11세기말에 돌발적으로 전투적인 십자군 형태를 취했다. 십자군 운동이 끼친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도교 정복자에게나 이슬람 피정복자에게 똑같이 해로운 것이었다.

13세기에 있었던 페르난도 3세의 안달루시아 정복은 남부 스페인에 영속적인 경제 파멸을 가져왔고, 카스티야의 경제 전망에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

ⓒ SiBr4/wikipedia | Public Domain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침입 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있던 다수의 서고트 귀족과 그 추종자는 아스투리아스 산중으로 퇴각해 서고트의 왕자 펠라요(718경~737경 재위)를 국왕으로 선정했다.

알폰소 1세(739~757 재위)는 갈리시아를 신왕국으로 합병했으며, 그뒤 여러 왕은 산간지방에서 중앙 평야로 진출하고 남부에서도 군사상 성공을 거두었다. 아스투리아스 최대의 왕 알폰소 3세(866~911 재위)는 영토를 넓혔으며, 가르시아 1세(910~914 재위)는 수도를 오비에도로부터 레온으로 옮겼다.

이후 가르시아의 후계자들은 아스투리아스의 왕이라는 칭호 대신 레온 왕이라는 칭호를 즐겨 쓰기 시작했다. 아스투리아스의 여러 왕은 서고트 왕국의 전통적인 계승자를 자임하고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을 이루고자 했다.

백작령이던 카스티야는 페르난 곤살레스 백작(930경~970 재위) 때 사실상의 독립을 이룩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혁신적인 경향과 레온의 보수적인 전통이 충돌하게 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결과 레온은 칼리프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고, 988년에는 만수르의 침입을 받아 레온 시는 파괴되었다. 그후 나바라 왕 산초 3세가 카스티야 지방을 점령한 뒤 레온 왕국의 동부를 점령해 '스페인 황제'의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레온 왕국의 독립을 위협했다.

나바라 왕국과 중세 스페인 제국
나바라 왕국

ⓒ Miguillen/wikipedia | Public Domain

나바라 왕국은 초기에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출범, 이미 10세기부터는 국토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에브로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산초 3세 대왕(1000~35 재위) 때는 카스티야·레온·소브라르베·바르셀로나 등을 지배하여 이베리아 반도 최강의 왕국이 되었다. 산초 대왕은 제국을 개인 재산으로 여겨 제국을 아들 4명에게 분할해 넘겨주는 유언을 남겼다. 장남 가르시아 4세는 나바라를 물려받았으며, 둘째아들 페르난도는 왕국으로 승격된 카스티야를 물려받고, 셋째아들은 소브라르베와 리바르고르사를 물려받았다.

아라곤은 넷째아들 라미로 1세(1035~63 재위)에 주어져 왕국이 되었다. 라미로는 소브라르베와 리바르고르사를 아라곤 왕국에 병합했고, 이때부터 아라곤은 독립된 역사를 시작했다.

1039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1035~65 재위)는 레온을 정식으로 합병하는 등 국경을 더욱 확대했다. 페르난도의 사후 영토에 대한 분쟁이 있었으나 결국 둘째아들 알폰소 6세(1065~1109 재위)가 전영토를 통일했다.

알폰소는 톨레도의 이슬람 왕국을 1085년에 정복하고, 또 문화적으로 앞선 모사라베(이슬람의 스페인 정복 후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신앙이 허용된 그리스도교도)나 유대인, 고도의 기술을 가진 수많은 이슬람 수공업자, 농민 등을 흡수해 카스티야 왕국의 인종적·문화적 구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스도교도의 통치하에서 이와 같은 변화는 스페인 이슬람 문명을 낳게 했다. 한편 알폰소의 비(妃) 브루고뉴의 콘스탄사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클뤼니의 수도사가 스페인의 교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mudejares)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도록 알폰소에게 압력을 넣어 스페인의 교회를 로마 교회에 한층 접근시켰다. 카스티야레온의 알폰소 7세(1126~57 재위)는 세력을 크게 떨쳐 1135년에는 '스페인 황제'의 칭호를 획득했다. 알폰소 7세는 국토를 분할하여 카스티야를 큰아들 산초 3세에게, 레온을 페르난도 2세에게 상속했는데, 이때문에 카스티야와 레온은 73년 동안 분리된 채 호족들의 무정부적인 당파 싸움이 계속되었고 스페인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레온 왕 알폰소 9세의 아들이자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외손자인 페르난도 3세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한(1217) 이후, 1230년 부왕의 뒤를 이어 레온의 왕이 됨으로써 카스티야와 레온은 영구 통합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융성

나바라 왕 산초 대왕의 유언에 따라 성립된 아라곤 왕국은 산초 1세 라미레스(1063~94 재위) 치세 때 나바라를 합병해 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알폰소 1세(1104~34 재위)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나바라인과 아라곤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바라는 아라곤 왕국에서 다시 분리되었다. 얼마 후 아라곤 왕국의 공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결혼해 알폰소 2세(1162~96 재위)를 낳았다. 그가 아라곤 왕위에 오르고 바르셀로나 백작위를 받게됨으로써 아라곤과 카탈루냐를 실질적으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스티야레온 왕국(1252~1479)
카스티야레온 왕국

ⓒ Rastrojo/wikipedia | CC BY 3.0

알폰소 10세(1252~84 재위) 때는 정치적으로 불운한 시대로서 카스티야는 포르투갈·아라곤·나바라와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1275년 맏아들 페르난도가 죽자 정치투쟁이 시작되어 고위 성직자와 귀족은 연합해 알폰소 10세의 퇴위를 꾸몄으며, 이로써 2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귀족과 국왕의 충돌기가 시작되었다(세르다). 산초 4세(1284~95 재위)의 손자 알폰소 11세(1312~50 재위)는 자치도시의회(concejo) 군대의 지지를 받으면서 귀족들을 탄압함으로써 절대주의를 어느 정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사이의 왕권 다툼으로 카스티야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서자 가운데 장자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는 적자인 잔인왕 페드로(1350~69 재위)와 19년간의 왕위 투쟁 끝에 1371년 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와 같이 왕위를 둘러싼 장기간의 싸움 과정에서 카스티야는 프랑스와 긴밀한 정치·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해군을 동원해 잉글랜드의 남해안을 위협했다. 한편 이렇게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엔리케와 그의 아들 후안 1세(1379~90 재위)는 여러 번 코르테스(신분제의회)의 도시대표에게 재정적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도시대표는 정부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후안 1세 치세 때 왕국은 재정적·군사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빠졌지만 프랑스의 군사원조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엔리케 4세(1454~74 재위) 때 궁정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왕이 죽은 뒤에 왕녀 후아나와 엔리케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내란이 일어나 카스티야는 정치적·경제적·도덕적으로 쇠퇴했다. 마침내 내란에서 승리한 이사벨은 이사벨 1세(1474~1504 재위)로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이사벨은 왕위에 오르기 전 1469년에 아라곤의 왕위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의 통합을 예고했다.

아라곤-카탈루냐 왕국(1276~1479)

아라곤은 발렌시아 정복으로 국토회복운동을 끝냈기 때문에 이제 카스티야의 종속국이 되지 않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페드로 3세(1276~85 재위) 때는 이탈리아에 정치적·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페드로가 시칠리아의 왕녀와 결혼해 시칠리아 왕이 된 뒤 14세기에 들어와 아라곤가의 시칠리아 왕위는 안정을 이루었다. 알폰소 5세(1416~58 재위) 때 이탈리아에서 아라곤의 세력은 빠른 신장을 보였으며, 1443년 알폰소는 나폴리 왕국의 지배자로서 수도를 나폴리로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이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의 정치정세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은 않았다. 이 두 나라의 독립주의는 급속히 발전되어 카탈루냐에서는 왕에 대항한 반란이 11년 동안 일어났고, 아라곤 국내에서는 13세기 이래 귀족층이 도시와 동맹하여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 국왕과 대립했다. 이에 대해 페드로 4세(1336~87 재위)는 1348년 동맹군을 격파하고 반왕권세력을 진압했다.

나아가 페드로는 마요르카 왕국을 합병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카스티야의 패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아라곤은 1412년 카스티야로부터 페르난도 1세를 국왕으로 맞아들였는데, 이 사건은 이베리아 반도 최대의 양국의 통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가 1479년 아라곤 왕위에 올랐을 때 마침내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양국을 함께 다스려 '가톨릭 부부 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두 나라는 규모면에서나 제도·전통·언어 면에서 크게 달랐기 때문에 이것은 두 왕위가 합쳐진 것일 뿐 두 왕국의 통일은 아니었다.

각기 왕국은 자체의 관세기구·화폐·법령·의회를 가지고 운영하면서 종교재위원회만 공동으로 설치했다. 이들 부부 왕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전제적 중앙집권화로 왕권을 강화했다. 스페인은 많은 이슬람인과 유대인이 살고 있는 나라로서 서유럽에서 유일한 다민족·다종교국이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1478년 교황 식스토 4세로부터 종교재판 개설 교서를 받아 국왕의 법정으로 설립되었다. 모든 임명은 국왕의 권한으로 행해지며, 재판진행은 비공개였다.

1492년 초대 종교재판장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는 반(反)유대인 선전운동을 개시해 세례받기를 거부한 유대인의 추방을 국왕에게 요청했으며, 그결과 17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가톨릭 부부 왕은 두 왕국의 통합 후에 국토 회복의 열망을 강력히 표명했다. 이사벨 여왕은 정복전쟁에 앞서 카스티야 사회의 결속을 강화했다. 이어 이베리아 반도 왕국들의 정치적 통합을 위하여 그라나다를 정복했고, 로세온 백작령과 세르데냐 백작령을 합병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과의 합병 시도는 실패했다.

합스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 가(Haus Habsburg)

오스트리아 가문은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이다. 1438년부터 1740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연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 Hugo Gerhard Ströhl/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죽은 뒤 스페인 왕위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의 아들 펠리페 1세와 가톨릭 부부 왕의 딸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로스 1세(1516~56 재위)가 계승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계자이기도 한 카를로스는 1519년에 카를 5세로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가 두 왕가로부터 오스트리아·카스티야·아라곤을 비롯해 이탈리아 영토와 신대륙과 아프리카의 식민지 등을 물려받음으로써 카를로스 1세의 집권기에 스페인은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정치적 주역이 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거대한 두 제국을 정복하고 동아시아에도 식민지를 만들었다. 한편 스페인은 당시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와는 달리 정복한 나라의 개종이나 통치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가 언제나 식민지 개척에 동행했다. 또 국왕은 식민지와의 모든 무역이 세비야를 경유하도록 해 카스티야의 독점 사업이 되도록 노력했다. 멕시코와 페루로부터는 다량의 은이 유입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경제적인 생산에 사용하지 않고 수입품과 해외파견군, 외국채권자에게 지불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신대륙의 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가난한 나라였다.

카를로스 1세가 퇴위하자 독일(오스트리아 포함)을 제외한 스페인의 전영토를 펠리페 2세(1556~98 재위)가 계승함으로써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펠리페 2세는 즉위와 동시에 관료조직을 완비하고 해이한 국가질서의 수립에 정진하는 한편,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를 국가의 행정기관으로 개편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스페인 침투 방지에 주력했다.

1580년 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성취했다. 그결과 브라질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소유해 스페인의 주도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무역의 기초가 되는 모직물이 네덜란드산·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되어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와 징세를 강화했으나 이는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했으며,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한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했다.

1588년 펠리페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파견한 '무적함대'의 참패는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상승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펠리페 2세의 아들 펠리페 3세(1598~1621 재위) 때는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국내적으로는 30만 명의 이슬람교도 추방으로 중산층의 재정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결국 스페인 경제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다.

펠리페 3세의 맏아들 펠리페 4세(1621~65 재위) 치하에서 스페인의 쇠퇴는 더 한층 두드러졌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1665~1700 재위) 때는 파멸적이었던 물가앙등도 다소 진정되었고, 중상주의 정책의 채택으로 경제도 느리게나마 회복되어갔다.

부르봉 왕조

부르봉 왕조

ⓒ Heralder/wikipedia | CC BY-SA 3.0

1700년 카를로스 2세는 후사 없이 죽으면서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계승자로 지명했으며, 이 유언에 따라 필리프는 펠리페 5세(1700~46 재위)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황제 레오폴트의 아들 카를의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전유럽 열강 사이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펠리페 5세의 왕위가 인정되었으나, 스페인은 이탈리아 영토를 상실하는 동시에 영국에 지브롤터를 양도해야 했고 이로써 국가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 1세는 가톨릭교 보호라는 명목으로 스페인에 진출했다.

1796년 8월에 산일데폰소 조약으로 동맹을 체결한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과 싸우기로 했으나 두 나라의 연합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영국 함대에 패했다. 1807년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점령 후의 영토를 분배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스페인에 진입하여 전략적인 주요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여 스페인 주민들은 개혁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해 아랑후에스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1808년 3월 18일에 카를로스 4세를 퇴위시킨 뒤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옹립했다. 이에 나폴레옹 1세는 속임수를 써 페르난도 7세를 발렌사이 성에 유폐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호세)를 스페인 군주로 옹립했다. 이에 저항하여 전스페인 주민들은 각 지역에서 평의회를 결성하여 강력히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마침내 스페인-영국 연합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반도전쟁). 1814년 전쟁이 끝나자 페르난도 7세(1814~33 재위)가 귀국하여 통치했다. 1820년 군부의 개입으로 3년간 입헌주의가 복귀했으나 다시 전제주의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독립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페르난도 7세가 죽은 뒤 온건자유파는 그의 딸 이사벨의 계승을, 보수파는 그의 동생 카를로스의 계승을 주장했으나 결국 이사벨 2세(1833~68 재위)가 집권했다. 카를로스파는 1833~40, 1872~76년에 걸쳐 내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사벨 2세는 35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6개의 헌법을 공포하고, 41번이나 내각을 개편했으며, 15번의 군사반란을 겪었다. 1848년의 유럽 혁명 후 스페인에 많은 자유주의 사조가 들어왔다. 그 결과 1868년 프림 장군이 주도한 혁명으로 이사벨 2세는 축출되고, 1870년 11월 이탈리아 왕의 차남 아마데오 1세가 입헌군주로 영입되어 2년간 통치했다.

1873년 2월에는 아마데오가 퇴위하고 제1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각지방의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11개월 동안 공화국체제는 4명의 대통령을 맞이했으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874년 1월에 세라노 장군이 통치권을 장악하여 북부의 무정부주의적인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후기 부르봉 왕조

알폰소 12세(Alfonso XII)

스페인의 국왕이자 1차 스페인 공화국을 통치했던 수반이다. 왕정 복고가 이뤄지면서 등극한 첫 왕이다.

ⓒ F Voight/wikipedia | Public Domain

1874년 12월 29일 사군툼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은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1874~85 재위)를 국왕으로 추대해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켰다.

알폰소 12세는 집권 후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세습입헌군주제에 양원제를 채택했다. 가톨릭을 국교로 정했으나 다른 종교도 인정했다. 1885년 11월 알폰소 12세가 죽은 지 5개월 뒤에 태어난 알폰소 13세(1886~1931 재위)는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 2세의 섭정하에 스페인 왕이 되었다. 1898년 12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등을 상실하여 위기를 맞이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이제 모로코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침투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리프족에게 패해 기득권 확보에 급급해야 했다. 해외 활동이 없어진 과대한 군대는 국민경제에는 부담이 되었고 정치에도 간섭할 위험성이 있었다.

1901년 총리가 된 사가스타의 내각이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 문제였다. 사회주의의 선동과 아나키스트의 직접 행동하에 노동자들의 여러 조직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1902년에는 사라고사·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이에 대해 극심한 탄압으로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은 조르주 소렐의 영향을 받은 노동조합주의 운동을 강화시켜주었을 뿐이었다.

1902~23년에는 33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16세로 친정을 하게 된 알폰소 13세는 마우라 정권 붕괴 후 보수파의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내의 여러 대립이나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스페인의 여론은 양분되었다. 군인·성직자·관료·지주 등 보수당 우익세력은 독일을 지지하고, 노동자·상공업자·지식인 및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등 자유당 좌익세력은 연합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토 총리가 절대중립을 선언·고수함으로써 산업활동이 활발해지고 경제는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분리주의 운동은 극에 달했다. 카탈루냐 자치운동이나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중에도 계속되었고 1917년부터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크게 고조되었으나 결국 군대의 무력탄압에 굴복했다. 1921년 모로코에서 스페인군의 패전은 본국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정부는 붕괴되고,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 군부 사이에 심한 분쟁을 야기했다. 그러다가 1923년 9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군사독재내각 수립을 표명했다. 스페인군은 1925년 9월 모로코에 상륙했고 1927년에는 모로코의 전지역을 장악했다.

리베라는 '최고국민회의'를 소집해 입헌적인 외관을 갖추고, 공공사업·재정·치안유지 등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초기에 수출과 경제팽창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1929년 공황 이후에는 왕실과 불화했다. 점증하는 학생시위와 지역 사태로 1930년 1월 리베라는 사임했다. 그의 뒤를 베렝게르 장군이 이었으나 경제는 불안정했다. 군주제를 반대하는 혁명위원회가 산세바스티안에 결성되었으며 1931년 4월의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공화파는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결국 혁명위원회는 제2공화국의 임시정부가 되었다.

스페인 제2공화국

좌익계 공화파는 1931년 6월 제헌의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스페인을 "모든 노동자의 민주 공화국"으로 규정하는 공화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서는 남녀평등의 보통선거권, 단원제의회, 대통령 임기 6년, 귀족제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지방 자치제에 따른 연방주의 등을 규정했다. 스페인의 농업개혁은 공화정부에 있어서 긴급한 문제였으므로, 1932년 10월 정부는 신농업법을 발포하고 부재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도록 규정했다.

한편 1932년 9월에는 카탈루냐 자치법이 성립되어 카탈루냐는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며, 카탈루냐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많은 일을 했음에도 여론은 좌파정권에 비판적이었으며 보수세력도 반격을 가해 아사냐 내각은 사직하고 다시 중도 급진당 알레한드로 레룩스가 정국을 맡았다. 이에 대해 1934년 10월 카탈루냐에서 마드리드 지배에 반대해 무장봉기가 일어나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연방공화국의 카탈루냐 국가"가 선언되었으나, 카탈루냐와 아스투리아스를 주축으로 하는 10월 투쟁은 유혈 끝에 진압되었다. 1936년 1월에는 선거를 통해 공화파·공화좌파·사회당·공산당 등으로 이루어진 '인민전선'(frete popular) 정부가 아사냐를 수반으로 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익인 군부가 이에 대항함으로써 소요는 끊이지 않았다. 1936년 7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휘하는 군이 파시스트 반란을 일으켰으며, 본토 각지의 병영에도 파급되어 드디어 내전으로 번졌다. 마드리드·바르셀로나·발렌시아 등에서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모로코·카디스를 비롯한 북부의 대부분은 반란군이 장악했다. 정부군은 훈련받지 않은 지원병이었으나 반란군은 육군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세한데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았다. 정부군도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 온 대규모 지원병 부대인 국제여단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정부측은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의 지중해안 항만 폭격에 대해 국제연맹이나 불간섭위원회에 항의를 계속했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지지를 잃었다. 1939년 3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가 함락되자 프랑코는 라디오를 통해 내란종결을 선언했다. 3년에 걸친 내전에서는 7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스페인 내란). 내란이 끝나자 프랑코를 통령(統領)으로 하는 파시즘 국가가 탄생했고 스페인 공화국은 끝을 맺었다. 영국·프랑스·미국 등은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다. 프랑코 정권은 인민전선측에 가담했던 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이 유일한 공인정당이 되었다.

현대의 스페인

스페인

스페인 국기

ⓒ Pedro A. Gracia Fajardo/wikipedia | CC0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페인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전세에 따라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를 교묘하게 오갔다.

1943년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붕괴한 뒤 스페인은 연합국과 독일의 강화를 중개하고자 했지만 독일에 물자를 수송하고 있던 스페인의 중립을 연합국측은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스페인을 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파시즘 국가 스페인은 고립되었다. 1946년 국제연합(UN)이 스페인 전체주의 체제의 폐지를 요구하자 프랑코는 국내에서 1943년부터 형식적인 의회를 열어 왕정복고를 시사하기도 했다.

프랑코는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에 힘쓰는 한편, 1954년 알폰소 13세의 손자로 당시 16세이던 돈 후안 카를로스가 프랑코가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왕정복고를 비공식적으로 약속했다. 대전 후 고립된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그러나 스페인은 미국·영국과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1953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군사 기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군사·경제 양면의 원조를 받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1955년 12월에는 UN의 일원이 됨으로써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6년 4월, 스페인은 모로코와 협정을 맺어 1921년에 체결한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모로코의 완전독립을 승인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는 이제 모로코 앞바다에 있는 5개의 작은 섬과 이프니, 스페인령 사하라, 페르난도포 섬과 리오무니가 남았다. 1960년대의 스페인은 세계적 경제성장의 물결에 편승해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은 해마다 7%를 넘었다.

특히 관광산업이 발전함과 더불어 외자도입에 따라 금속공업·화학공업 부문이 급성장했다. 그러나 내각이 교체될 때 경제민족주의를 주장하는 팔랑헤당은 물러가고 가톨릭계 엘리트 집단인 '오푸스 데이' 소속의 테크노크라트 관료와 실업가의 손에 실질적인 정치적 지도력이 옮겨갔다. 이 경제적 번영은 1970년대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대규모의 관개 계획 등을 세우면서도 농촌은 방치했으므로 농업생산은 전혀 향상되지 않았고, 농업 노동력은 도시와 외국으로 유출되었다.

또한 도시 노동자는 팔랑헤당이 지도한 관제조합에 환멸을 느껴 노동위원회를 발족시켜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코는 1966년 1월 2일 국가기본법을 의회에 상정하고 원수와 총리직을 분리하며 의원 1/6을 직접선거를 통해 뽑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 독재체제를 완화하고자 했다. 1968년에는 스페인령 기니(적도 기니)의 독립을 승인하고 이프니를 모로코에 할양했다. 팔랑헤당은 '국민운동'이라 개칭하고 보수세력으로서 의회에 진출했다. 1975년 11월 20일 프랑코 총통이 죽고 2일 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취임했다.

카를로스는 헌정개혁과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여 1976년 4월 헌법개정계획을 발표했다. 또 1976년 7월에는 아돌포 수아레스가 신임 총리로 취임했다. 민주화 계획에 따라 11월 의회에서 정치개혁법이 승인되고, 다음해 3월에는 국민투표법이 통과되었다. 1977년 4월 국민운동당을 해체하고 공산당을 승인했다. 1977년 6월의 선거에서 수많은 지역정당이 부상하고, 수아레스의 민주중도연합(UCD)이 승리했다.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어 민주화를 위한 개혁이 추진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신헌법이 채택되어 효력을 발휘했다.

신헌법은 스페인을 입헌군주국으로 하고 가톨릭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982년의 선거에서 사회노동당(PSOE)이 46%의 지지로 다수당이 되어 펠리페 곤살레스가 총리로 취임했다. 사회노동당 정부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각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이었다. 제한된 자치권이 1977년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에 주어진 이래 1978~80년에 발레아레스와 카스티야레온 및 에스트레마두라 그리고 안달루시아와 갈리시아에도 주어졌다.

그러나 바스크 분리주의 집단(ETA)은 테러 활동을 계속했으며, 스페인 정부는 1984년 프랑스의 협조를 얻어 테러리즘을 진정시켰다(에테아). 1985년 유럽 공동체(EC)에 가입했고 1989년 10월에는 사회노동당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스페인은 세비야 국제박람회,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 그리고 콜럼버스 신대륙발견 500주년 기념행사 등을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국제적으로 다원주의 사회의 발전과 과거의 영광을 과시하면서 국가위신의 회복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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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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