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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츠버리

다른 표기 언어 Anthony Ashley Cooper, 1st Earl of Shaftesbury
요약 테이블
출생 1621. 7. 22, 잉글랜드 도싯 윔번세인트자일스
사망 1683. 1. 2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적 잉글랜드

요약 영국의 정치가.
Baron Cooper of Pawlett, Baron Ashley of Wimborne St. Giles라고도 함.

목차

  1. 개요
  2. 어린시절과 청교도 혁명 때의 역할
  3. 찰스 2세 시대의 공직
  4. 배제 법안

개요

크롬웰의 공화국(Commonwealth) 시기에 국무회의 위원(1653~54, 1659)을 지냈고, 찰스 2세 때는 '각료 회의' 위원이자 대법관(1672~73)이었다.

그는 가톨릭교도인 요크 공작(훗날 제임스 2세)을 왕위계승에서 배제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반역 혐의를 받았다. 이 혐의는 벗겨졌지만 그는 영국을 탈출해 망명생활을 했다.

어린시절과 청교도 혁명 때의 역할

1621년 도싯의 윔번세인트자일스에서 태어난 쿠퍼는 외할아버지 앤소니 애슐리 경과 아버지 존 쿠퍼 경으로부터 도싯과 윌트셔에 있는 영지를 물려받았다.

비록 성년이 되기 전에 법정 소송을 통해 일부 유산을 잃었지만 남은 유산도 막대했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정치에 뛰어들 생각을 할 수 있었다. 1639년 2월 25일에 그는 찰스 1세의 국새상서인 코번트리 경의 딸 마거릿과 결혼했지만 이 결혼은 10년 뒤 아내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18세밖에 안 된 1640년에 단기 의회(4~5월)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장기 의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등원을 허락받지 못했다.

1642년 내란(청교도 혁명)이 일어났지만 쿠퍼는 1643년 여름이 되어서야 국왕편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옥스퍼드에 있는 왕당파 궁정(왕의 사령부)을 지배하고 있던 정치·종교 세력에 불만을 품고 1644년 2월 의회쪽으로 돌아섰으며 1644년 도싯 군사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645~52년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1650년 엑서터 백작의 누이인 레이디 프랜시스 세실과 결혼했고, 의회의 법률개혁안 심의회를 돕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가 1653년에 베어본스 의회(7~12월)의원으로 지명된 것은 이 위원회 위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653년 12월 그는 이 의회의 다수파인 보수적 의원들을 설득해 승리를 거둔 청교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에게 권리를 양도하도록 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결과 그는 1654년 국무회의 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이 국무회의는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하는, 호국경 정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통치 헌장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또한 이 헌장의 규정에 따라 처음 열린 의회의 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와 크롬웰의 제휴는 그해말에 끝났다. 그 이유는 갈수록 의회를 무시하고 군대에 의지하는 크롬웰 정권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654년에 2번째 아내가 죽었고 그는 1655년에 사우샘프턴 백작의 조카인 마거릿 스펜서를 3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사우샘프턴 백작은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도 영국에 남아 있던 지도적인 왕당파 귀족이었지만, 어떤 정치적 대안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1660년까지 쿠퍼가 왕정복고를 적극 지지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5월 8일에 쿠퍼는 하원이 찰스 2세에게 영국 귀환을 요청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파견한 12명의 대표단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찰스가 이렇게 해서 돌아온 뒤 쿠퍼는 찰스의 추밀원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찰스 2세 시대의 공직

1660~73년에 쿠퍼는 찰스 2세 밑에서 공직을 갖고, 1661년에 애슐리 경이 되었으며 1672년에는 샤프츠버리 백작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지성과 실무능력을 인정받았고 상원에서 유능한 연설솜씨로도 널리 인정을 받았지만, 수상쩍은 정치경력으로 인해 당시에는 그리 중요한 직책이 아닌 재무상서 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1660년대말경에는 이미 왕의 '각료회의'의 일원이 되었고 1672년에는 대법관이 되었다. 링컨스인 법학원(런던에 있는 4개의 법률학교 겸 학회 가운데 하나)에서 단기교육을 받은 것 이외에는 법률가로서 공식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채 대법관 법정에서 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그는 1670~73년에 나온 3개의 특별 조치에 관여했다.

첫째는 부채 상환을 12개월 동안 연기함으로써 찰스가 세입을 해군 군비에 사용할 수 있게 한 1672년의 국고지불정지 조치이고, 둘째는 역시 1672년에 나온 신앙자유령, 셋째는 1672~74년의 제3차 네덜란드 전쟁이다. 그러나 국고지불정지 조치는 오늘날 토머스 클리퍼드 경의 책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번째 조치는 비국교도(영국국교회에 속하지 않는 종교집단)에 대한 관용을 확보하려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지만, 왕과 클리퍼드는 그 신앙자유령을 주로 가톨릭교도 구제책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제3차 네덜란드 전쟁은 네덜란드와 벌여온 무역 경쟁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고 샤프츠버리는 생각했다.

일찍이 1670년에 그는 네덜란드의 무역우위를 줄이기 위해 명목상 영국-프랑스 조약을 맺었지만, 그전에 맺어진 비밀 도버 조약의 조항 가운데 찰스가 스스로 가톨릭교도임을 선언한 조항이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쿠퍼는 찰스의 이러한 신앙고백을 결코 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1673년에 그는 가톨릭교도를 공직에서 배제하기 위해 마련한 제1차 심사령을 지지했고, 왕의 동생이자 후계자이며 가톨릭교도인 요크 공작 제임스가 같은 가톨릭교도와 결혼하는 것에 반대했다. 1673년말에 찰스는 더이상 대법관인 쿠퍼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해임했다.

그후 몇 년 동안 샤프츠버리는 왕과 재무장관 댄비에 반대하는 야당인 휘그당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가로 등장했다.

그러던 중 1678년에 타이터스 오츠라는 영국성공회 성직자가 가톨릭교도들이 찰스를 죽이고 제임스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음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가톨릭 음모사건). 이 정보 덕분에 샤프츠버리는 처음으로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잡았다.

그가 그 이야기를 꾸며낸 것은 아니었고 그가 먼저 오츠를 부추겨 나서게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벌어진 혼란 속에서 샤프츠버리는 정치적 혼란을 억제하고, 면밀한 파벌망을 조직했으며, 선거에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했고, 의회에 많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배제 법안

찰스의 서자이며 자신의 꼭두각시이고 왕위계승 후보자인 몬머스 공작을 이용해 가톨릭교도인 제임스를 왕위에서 배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샤프츠버리의 주된 전략이었다.

이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지만 상원에서는 왕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부결되었다. 1681년 3월 21일 옥스퍼드에서 다음 의회가 열리자 샤프츠버리는 무장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옥스퍼드로 달려갔다. 그러나 찰스는 1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이 의회를 해산했다. 샤프츠버리는 1명의 추종자도 없이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고 전국적인 혼란상태가 가라앉자 명분마저 잃어버렸다.

그는 1681년 7월 2일에 체포되어 런던 탑에 갇혔지만 11월 런던 대배심원은 날조된 그의 반역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이 열리기 직전에 존 드라이든의 풍자시 〈압살롬과 아히도벨 Absalom and Achitophel〉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것은 샤프츠버리를 공격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샤프츠버리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의회가 해산된 뒤 다시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은밀히 논의하다가 1682년 11월 영국을 탈출하여 1683년 1월에 네덜란드에서 죽었다.

샤프츠버리는 지적이고 매력적이며, 식민지 건설과 관련한 문제를 비롯해 다방면에 걸쳐 대체로 계몽된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1663년에 북아메리카 캐롤라이나의 땅을 하사받은 8명 가운데 1명이었고, 1672년 교역 및 해외 식민지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1674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를 도와서 캐롤라이나의 〈기본 헌법 Fundamental Constitutions〉을 기초하고, 1668년에 그의 생명을 구해낸 외과 수술을 지휘·감독한 철학자 존 로크는 1667~75년에 그와 한솥밥을 먹은 식구였다. 로크에 관한 최근의 학술연구는 그와 샤프츠버리의 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당파심이 강한 드라이든의 풍자작품을 비롯해 샤프츠버리 백작에 대한 적대적이고, 때로는 부당한 평가가 남긴 그릇된 인상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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