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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아일랜드 역사의 일부였다.
그러나 5, 6세기부터 켈트어로 울라이드(얼스터)라 알려진, 뚜렷이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문화가 북부지역에서 발달되었다. 얼스터의 역사에 대해 문서화된 가장 초기의 기록은 7세기의 것이다. 8세기에 이르러 섬의 씨족들이 무리를 지어 5개의 지역을 형성했는데, 그중 오닐 왕조 밑의 얼스터가 11세기까지 주도세력이었다.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사우스웨일스, 유럽 대륙으로부터 온 노르만족이 아일랜드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205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존 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얼스터 백작을 탄생시켰다. 16, 17세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이주자들이 개신교 신앙을 갖고 아일랜드, 특히 얼스터에 정착했다. 얼스터의 개신교 인구는 1685년 낭트 칙령 폐지 후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야 했던 위그노들이 18세기에 이 지역을 피난처로 삼음으로써 더욱 늘어났다.
이민자들의 상공업 기술은 리넨 제조업의 발달에 기여했으며, 이 리넨 제조업은 19세기 벨파스트·래건밸리의 산업화에 토대가 되었다.
1801년 합동법에 따라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라는 이름아래 영국 본토(Great Britain)와 아일랜드의 법률상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40년대의 대기근을 포함한 19세기의 많은 위기로 인해 아일랜드 지방자치(제한적 자치정부)를 성취하려는 세력이 생겼다.
최초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1886년, 2번째는 1893년, 3번째와 마지막 것은 1912∼14년에 각각 상정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법령의 발효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연기되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는 2개의 자치제 설립을 규정했는데, 1개는 얼스터의 9개주 가운데 6개주(지금의 북아일랜드)로 구성되고, 다른 1개는 얼스터의 나머지 3개주와 함께 남아일랜드의 23개 주(지금의 아일랜드 공화국)로 구성되었다.
남아일랜드는 1916년의 부활절 봉기에 의해 과격화되어 완전독립을 요구하면서 아일랜드 지방자치를 전면 거부한 반면, 얼스터의 6개 주는 영국 본토와의 합병을 더 선호했지만 지방자치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1921∼40년 북아일랜드는 공공연한 종파주의 국가로서,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도들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를 지배했다. 소수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차별로 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시골로부터 섬유업과 조선업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벨파스트 같은 공업중심지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중반 위태롭게 지속되던 북아일랜드의 안정이 깨지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당시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에 고무된 로마 가톨릭교도 들이 벨파스트와 런던데리를 중심으로 시민권 확보 투쟁을 벌임으로써 신·구교 세력 간 종파주의 갈등이 폭력적 상황으로 치달았다. 공식적·비공식적 공격에 대한 가톨릭교도 보호를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들인 프로보스(Provos)의 출현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활동을 재개했다. 프로보스의 정치적 주장은 영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신교도에 의한 국가지배의 종식이었다.
이에 맞서 신교 세력은 자체적인 준(準)군사조직을 만들었다. 1970년대초 영국군이 평화유지라는 명목으로 북아일랜드에 진주했지만 얼마 안되어 이들은 가톨릭교도들에게 달갑지 않은 외부세력의 대변자로 비쳐지게 되었다. 영국군의 철수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통일의 사전단계로 간주한 IRA는 이를 위해 테러 시위를 계속했다.
1972년 3월 영국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는 북아일랜드의 헌법과 의회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내각 관료인 북아일랜드 장관을 임명해 이 지역 문제를 맡겼다.
1971∼76년 최악으로 치달았던 상황은 1980년대에는 다소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1년에 50∼100명이 정치적 학살과 암살로 숨지는 등 1990년대 중반까지 분쟁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무려 3,100명이 넘었다.
1980년대 이루어진 화해의 시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985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협정으로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 문제에 처음 공식적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1990년대에는 북아일랜드의 주요 합법 정당들이 모여 평화회담을 열었는데 IRA의 과격파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은 IRA가 연합론자(북아일랜드와 영국의 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군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계속 테러를 자행한다는 이유로 회담에서 배제되었다. 평화회담의 골자는 북아일랜드 주민들의 자결권을 보장하고, 북아일랜드 국민의 다수가 동의할 경우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영국 정부가 인정하며, 북아일랜드의 정치가 안정될 경우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등에 대한 헌법상의 주장을 포기한다는 것 등이었다.
1994년 IRA와 연합론자 군사조직 간의 휴전이 이루어 지고 종파 갈등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영국 정부와 IRA의 공식 대화가 시작됨에 따라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는 듯했으나, 1996년 2월 IRA의 폭탄 테러를 시발로 휴전은 파국을 맞았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에 당선되고 활발히 평화협상을 벌인 결과 1998년 4월 영국과 아일랜드 간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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