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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19년(광해군 11)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만주의 부차에서 후금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배한 전투.
임진왜란 뒤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가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뒤, 명나라의 변경을 자주 침략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날로 강대해지는 후금을 치기 위해 만주로 출병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내키지 않으나, 명분상 거절할 수 없어 1618년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로 삼고 1만여 명의 군대를 출병시켰다. 이때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비밀지시를 했다. 조선군은 포수 3,500명과 사수 6,500명이 평안도 창성에서 대기했고, 명군은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조선에 왔던 양호가 1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진출했다.
이듬해 2월 명군의 4개대 가운데 하나인 남로군이 조선군과 합류해 노성(老城 : 지금의 라오청)으로 향했다. 3월 1일에 남로군을 제외한 3군의 명군이 후금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모두 대패했고, 뒤이어 북상하는 조명연합군이 노성에서 60리 떨어진 부차에서 패하여 조선군은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와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했다. 이에 강홍립은 광해군에게 받았던 밀지에 따라 후금군에게 조선의 출정은 본의가 아니였음을 알리며 항복했고, 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한 보복행동을 하지 않았다. 즉 광해군이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처해가는 외교정책을 추진했으므로 후금의 조선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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