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펠리페 4세가 왕위에 오른 지 1년 뒤인 1622년에 벨라스케스는 왕궁의 후원을 얻기 위해 처음으로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그는 시인인 루이스 데 곤고라의 초상화(1622, 보스턴 미술관)를 그렸지만 왕이나 왕비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는 없었다. 그 다음해에 그는 세비야의 동향인이며 그후 그의 후원자가 된 수상 올리바레스 백작의 부름을 받아 마드리드에 갔다. 그는 마드리드에 도착한 뒤 곧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그려 이 그림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 이외에는 어느 화가도 왕의 초상화를 그리지 못한다는 약속과 함께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파체코는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려진 펠리페 4세의 기마 초상화(뒤에 분실됨)에 대해 "풍경을 포함한 모든 것이 실물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초상화는 "모든 궁정인들의 찬탄과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공개 전시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벨라스케스의 동료 미술가들은 그가 사람의 머리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라고 비난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시기로 인해 왕은 그에게 다른 궁정화가들과 겨루어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무어인들의 추방 Expulsion of the Moriscos〉(뒤에 분실됨)을 그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이 경쟁에서 이겨 상을 받았고 1627년에 왕의 궁정 의전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계속 다른 주제들도 그렸지만 궁정화가로서 주로 왕가와 그 측근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으며, 그리하여 이 기간에 펠리페 4세의 많은 초상화들을 그렸다. 파체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위대한 군주로부터 매우 후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궁 안에 큼직한 화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은 그 화실 열쇠와 전용 의자를 갖고 있어 거의 날마다 한가한 때는 그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에서의 지위로 인해 왕의 수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특히 그의 화풍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베네치아의 화가 티치아노(1490경~1576)의 그림들이 많았다. 펠리페 4세의 전신 초상화(1626경, 프라도 미술관)와 그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 왕자의 전신 초상화(1626경, 프라도 미술관)는 티치아노가 세운 스페인 왕가의 초상화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어느 정도 그의 양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초상화들에서는 벨라스케스가 세비야에서 그린 그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상세한 묘사와 테네브리즘은 완화되었고, 다만 얼굴과 손이 강조되고 밝은 배경을 바탕으로 어두운 색의 인물화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는 1628년에 플랑드르 바로크 양식의 대가인 페테르 파루벤스(1577~1640)가 2번째로 스페인의 궁정을 방문했을 때 그와 만났으며, 그뒤 후기의 궁정 초상화들에서 루벤스의 좀더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채색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파체코에 따르면,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의 꾸밈없는 작품들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술고래들 Los Borrachos〉(또는 〈바코스의 개선 The Triumph of Bacchus〉)로 알려져 있는 바코스에 관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주제에 대한 그의 사실적 접근은 스페인 고유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그뒤 전생애에 걸쳐 이러한 접근방식을 유지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