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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2. 5. 25, 이탈리아 사르데냐 사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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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4. 6. 11, 파도바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이탈리아의 공산당 서기장(1972. 3~1984. 6).
그는 '국가공산주의'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로서 모스크바로부터 독립하려고 애썼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현지사정에 맞도록 수정하여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베를링구에르는 사르데냐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자인 그의 아버지는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나중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1943년에 공산당원이 되어 고향인 사사리에서 청년공산당을 이끌었다. 1944년 그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반대시위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3개월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밀라노와 로마에서 청년공산당 조직책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48년에는 집행부의 일원이 되었다. 로마와 사르데냐에서 여러 당직을 거친 뒤 그는 라치오 지역담당 서기가 되었다.
1968년 이탈리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열린 공산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는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후 3년 동안 베를링구에르는 비록 훌륭한 연설가는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하는 일꾼이며, 화려한 인물이기보다는 현실주의자임을 보여주었다. 1972년 밀라노에서 열린 공산당 제13차 전당대회에서 그가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베를링구에르는 서유럽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의 서기장으로서 언제든지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자주 밝혔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민주당과 공산당의 '역사적 타협'이라고 불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그의 제안은 한 번도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베를링구에르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지방자치 정부를 장악한 정당의 지도자이며 국민에게 인기가 높은 인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6년 그는 총리의 공식자문위원으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공산당원이 그런 지위에 오른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1979년에는 유럽 의회 의원이 되었다. 1970년대말과 1980년대초에 베를링구에르는 소련 공산당 정부와 점점 반목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지지한다고 거듭 선언했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폴란드의 계엄령 시행을 비난했다.
베를링구에르가 중국 공산당과 공식관계를 다시 수립하기 위해 1980년에 중국을 방문한 것도 이탈리아 공산당과 소련 사이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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