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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00경, 폴란드 포돌리아 틀루스테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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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60, 메드치보츠 |
국적 | 하시디즘 |
요약
신비주의를 강조하고, 세속학문과 유대인들의 합리주의에 반대한 유대교 영성운동인 하시디즘의 카리스마적인 창시자(1750경).
간단히 베슈트(Beshṭ)라고도 함. 본명은 Israel Ben Eliezer.
육체적 고행을 포기하고 일상생활의 성결을 강조하며 일반인들과 어울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삭 벤 솔로몬 루리아가 부가한 엄격한 금욕주의를 카발라(비밀스런 유대교 신비주의) 유대교에서 16세기에 제거했다.
베슈트의 생애는 우화와 전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의 전기를 알 수는 없다.
그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발음으로 오코프 또는 아쿠프라고 부르던 마을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유대교 회당과 초등학교에서 하인과 다름없이 온갖 일을 했다. 쿠티의 에프라임이라는 부유하고 학식 있는 사람의 딸과 결혼한 뒤 신비적인 사색에 몰두하기 위해서 카르파티아 산으로 은거했고, 그동안 석회광에서 광부로 일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병 고치는 사람, 또는 약초, 주문, 신의 이름을 새긴 부적 등을 이용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인 '바알 솀'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후에 여관업과 제식용 도살업을 하다가 1736년경 포돌리아의 메드치보츠라는 마을에 정착했으며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거의 영적인 일에만 종사했다.
생존시에는 특별히 학자나 설교자로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장터에 나가 서민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동료 유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결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혹독히 비난했으나 또 어떤 사람들은 열렬히 칭찬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은 "높아지기 위해 먼저 낮아지는 것"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변호했는데, 이 개념은 결국 이런 형태의 영적 목회에 큰 가치를 두는 사회신학이론으로 발전했다. 이미 청년기에 당시 새생활의 창조자들로 이름을 날리던 고로덴카의 랍비 나흐만과 코소브의 랍비 나흐만 같은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3차례의 안식일 식사 의식을 거행했다.
3번째 식사를 끝낸 다음에는 신앙에 대해 설교와 강론을 하는 것이 점차 관례가 되었는데, 베슈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순서를 맡았으며 이 강론들 중 많은 내용이 훗날 기록되어 하시딤 문학의 핵심으로 보존되었다. 이 모임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영적 능력을 시험받게 되자(이것은 그가 아직 '동등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인자'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듯함) 천리안 능력을 사용하여 메주자(문설주에 붙여놓는 제의적인 물건)가 제의적으로 '부적당'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베슈트는 점차 동료들의 엄격한 금욕주의를 떠날 시기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메드치보츠의 랍비 바루크가 기록한 글에 의하면 베슈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사랑과, 이스라엘 사랑, 토라 사랑의 3가지 빛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육체의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베슈트는 새로운 의식을 위하여 고행을 포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대교 내의 새로운 신앙운동을 향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다음 3가지를 중심으로 한다. ①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하느님과의 사귐, ② '하늘을 위해서' 한 사람의 모든 행위(심지어 구두를 깁고 음식을 먹는 일까지도)는 모두 형식적인 계명을 지키는 것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일상 생활에서 몸으로 하는 봉사가 중요하다는 점, ③ 카발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신의 '불꽃'을 구출해내는 것이다. 그는 이 불꽃들이 모든 개인의 영혼과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영적인 욕구에 대해서도 민감해서 세상을 멀리하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일반 유대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유대 민족은 단일민족이며,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의 손과 발'이라고 했다. 베슈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춤추고 마시고 생을 향락한다'는 이유로 랍비들로부터 방탕하고 전통을 업신여기며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한 베슈트의 견해가 어떤지는, 서명은 없으나 그가 썼다고 전해지는 편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영혼이 승천하여' 하늘에서 메시아를 만나고 그에게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다. 메시아는 "네 우물이 차고 넘쳐 먼 데까지 흐를 때"라고 대답하는데, 이것은 베슈트가 먼저 하시디즘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함을 뜻했다. 이 이야기는 메시아의 도래가 베슈트 신앙에서 중요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또다른 견해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실제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메시아의 구원을 제외하는 것이다.
바알 솀 토브가 미친 영향
살아 있는 동안 커다란 사회적·종교적 격변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전통적 가치관을 영구히 바꾸어놓았다. 기쁨과 새로운 의식들, 황홀경 속에서 유대교 회당을 벗어난 조그만 기도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 분위기를 형성했으며, 그결과 독특한 옷을 입고 이야기를 하는 특기할 만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베슈트는 이스라엘을 방문한 적도 없고 아무 저서도 남기지 않았지만 죽을 때에는 오늘날까지 활발히 전개되는 하시디즘의 새로운 종교적 차원을 유대교에 부여했다. 뛰어난 제자로는 폴로노예의 랍비 야코브 요세프가 있는데 그의 책들에는 스승 베슈트의 가르침이 많이 나온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스승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지고 말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또다른 제자들, 즉 메즈레키에의 도브 바에르, 체르노빌의 랍비 나훔, 폴로노예의 아리에 라이브, 둘째 손자 시돌루브카의 랍비 에프라임 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에프라임의 경우는 수많은 전설로 자기 할아버지를 더욱 빛나게 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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