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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에 따르면, 시나이 산을 떠난 후 모세는 더 많은 저항과 좌절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스(에티오티아)의 여인을 2번째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그의 정력은 쇠퇴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미리암은 아론의 지원을 받아 이 결혼에 반대했다. 바란 광야의 카데시에서 정찰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정탐꾼들은 정탐을 끝내고 되돌아와서 주로 비관적인 보고를 했다. 이 정탐 보고는 북쪽으로 행군해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모세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취하려는 조치를 재고하도록 촉구했다. 그러자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야훼에게 중보기도를 드렸다. 왜냐하면 야훼는 그들을 멸망시키고 또하나의 더 큰 민족을 세우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분노가 자비를 능가하는 경우가 모세에게 단 1번 일어났다고 한다. 므리바(바란의 카데시 지역에 위치한 듯함)에서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을 반역자라고 칭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바위를 2번 쳤다. 그러자 목이 마른 백성들에게 물이 솟아났다. 그는 그 전에도 진노를 터뜨린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야훼의 이름과 명예, 대의명분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쟁을 일삼는 백성에 대한 극심한 좌절 때문에 화를 냈다. 야훼가 모세의 가나안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 과실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모세가 계속되는 압력하에서도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요르단 동편에서 에돔과 모압은 그곳을 지나게 해달라는 모세의 청을 거절했다. 에돔과 모압은 미디안의 속국으로서 그당시 새로 창설된 국가였다. 모세는 현명하게도 에돔과 모압의 동쪽으로 돌아갔고, 아모리 족의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을 공략했다. 모세는 일부 지파들이 요르단 동편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에 대해 모압족과 미디안의 대군주는 반발했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저주하기 위해 시리아의 점술가인 발람을 고용했다. 그러나 발람은 도리어 히브리인들을 축복했다.
일부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것은 발람이 야훼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발람은 나중에 옛 신앙으로 되돌아갔음이 분명하다. 성서의 전승에 따르면, 발람은 과거의 고용주들에게 히브인들을 종교적으로 유혹해 그 힘을 약화시키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죽기 직전 미디안족에 대한 거룩한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어 그들의 적대감을 응징했다. 모세는 광야 편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시나이 계약을 갱신했다. 이것이 모세가 마지막으로 행한 공적인 활동이다.
모세는 요르단 협곡의 진영에서 나와 피스가(비스가)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 히브리인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고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비밀에 싸여 있다. 전승에 따르면, 야훼는 모세를 벱브올 건너편 계곡에 묻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배교를 기념하는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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