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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1. 3. 16, 독일 귄츠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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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9. 2. 7, 브라질 상파울루 근처 엔세아다다베르티오가 |
국적 | 독일 |
요약 독가스실 운영을 지휘했고 인종 연구를 위해 수용자들을 상대로 의학 실험을 시행했다. 1920년대에 뮌헨에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인종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에서 의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나치 돌격대에 자원입대했고, 열렬한 나치 당원이 된 요제프 멩겔레는 1934년 새로 세워진 유전생물학 및 인종위생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1943년 아우슈비츠 근처에 있는 비르케나우 집단학살수용소의 수석 의사로 임명받았다. 그곳에서 멩겔레가 이끌던 연구진은 유대인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출산과 단산, 생식력 증가 방법 등의 연구를 위한 의학실험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멩겔레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여러 나라에 숨어 지냈다. 1985년 다국적 수사팀은 멩겔레가 1979년 사망했으며 예전 나치였던 볼프강 게르하르트의 이름으로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제프 멩겔레는 독가스실 운영을 지휘했고 인종 연구를 위해 수용자들을 상대로 의학 실험을 시행했다.
요제프 멩겔레는 1920년대에 뮌헨에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인종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에서 의학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나치 돌격대에 자원 입대했고, 열렬한 나치 당원이 된 멩겔레는 1934년 새로 세워진 유전생물학 및 인종위생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바펜 친위대의 군의관으로 활동하다 1943년 하인리히 히틀러에 의해 아우슈비츠 근처에 있는 비르케나우 집단학살수용소의 수석 의사로 임명받았다. 그곳에서 요제프 멩겔레와 휘하 연구진은 입소 유대인들을 골라 출산과 단산에 관한 연구를 했으며, 독일 민족의 번성이라는 목적 아래 생식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수용자들에 대한 의학 실험을 지휘했다. 멩겔레의 주된 관심은 쌍둥이 연구에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멩겔레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지하로 잠복해서 바이에른 주의 로젠하임 근처에 있는 한 농장에서 마부 행세를 하며 4년을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1949년 제노바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탈출했다고 한다.
1958년 우루과이에서 본명으로 2번째 결혼을 했으며, 1959년에는 파라과이에서 '호세 멩겔레'라는 이름으로 시민권을 취득했다(이 시민권은 1979년에 취소되었음). 1961년에 브라질로 이주한 것 같고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예전에 나치였던 볼프강 게르하르트(나중에 유럽으로 돌아갔음)와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 브라질·독일(서독) 그리고 미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수사팀은 요제프 멩겔레가 게르하르트의 신분을 이용하다가 1979년 수영 도중 뇌일혈로 사망했으며 게르하르트의 이름으로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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