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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0. 3. 7, 오스트리아 제국 모라비아 괴딩 근처(지금의 체크 호도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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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7. 9. 14, 체코슬로바키아 라니 |
국적 | 체코슬로바키아 |
요약 체코슬로바키아의 건국 공로자, 초대 대통령(1918~3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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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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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
초기생애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 마부였고, 하녀였던 어머니는 독일로 귀화한 모라비아 가계(家系) 출신이었다.
일찍이 교사훈련을 받았으나 잠시 자물쇠 수리공의 도제로 일하기도 했다. 1865년 브르노의 독일계 단과대학에 입학했으며 빈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876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마사리크는 1년 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수학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인 음악도 샬럿 개리그를 만나 1878년 결혼했다. 1879년 빈대학교 철학강사가 되었고 1882년에는 프라하의 체코대학교 철학교수로 부임했다. 신칸트파(派)에 속했던 그는 영국의 청교도 윤리와 후스파의 엄정함에 많은 영향을 입었다.
한편 자본주의의 자기모순성을 비판하는 데도 관심을 두어 자살문제를 현대문명의 집단현상으로 취급한 바 있다.
체크의 개혁 및 19세기 초엽의 부흥운동에 관한 초기 연구는 체크인들에게 전통이 갖는 종교적인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인과 슬라브인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던 체크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에 대한 연구에서 오스트리아와 체크 사이의 긴장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팔라츠키). 그는 2개의 정기학술지를 창간했고, 이들을 통해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 필적할 만한 슬라브 민요로 간주되어 왔던 중세 초기의 체코 시 2편이, 사실은 19세기초 한 애국시인에 의해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마사리크는 1889년 학술지 하나를 정치평론지로 전환시키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890년대초 그는 헝가리 북부의 슬로바키아인들에게 관심을 돌려 헝가리 왕국의 봉건적 특성은 물론 슬로바키아 정치가들의 고루한 범슬라브주의를 동시에 비판했고 슬로바키아 청년 진보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918~19년 마사리크의 영향을 받은 진보지식인들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중세 체크 시편들의 정체를 폭로한 바 있는 마사리크는 사회적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종교의례상의 살인혐의로 유대인들이 기소되자 여론을 무시한 채 다시 한번 윤리적 정당성을 추구했고 그들의 무고함을 입증해냈다(1899). 그는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1914년까지 기념비적인 연구논문 2편을 완성했는데, 1898년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연구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의 내재적 모순을 논의했고, 1913년의 〈러시아와 유럽 Russia and Europe〉은 러시아의 종교적·지적·사회적 위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서 정교회(正敎會)와 반동적 이념이라는 '비잔틴적' 걸림돌로 초래된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혼돈상을 검토한 것이다.
정치가 마사리크는 1848년에 제시된 바 있는 오스트리아-슬라브 연방안의 지지자였지만 노(老)체크당의 충성스럽고 보수적이며 로마 가톨릭적인 노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우며 중산층을 세력기반으로 하는 청년 체크당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1891년 오스트리아 제국 의회에 진출했으나, 청년 체크당의 감상적 민족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으므로 의원직에서 사퇴했다가(1893), 1900년 3월 '현실주의당'을 창설했으며, 재선된 후 보다 민주적인 성향이 짙어진 제국의회에서 좌파 슬라브 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마사리크는 제국의회와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 국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독일과의 동맹 및 발칸 제국에 대한 독일의 제국주의 정책을 공격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했을 때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의 권익을 옹호했다.
독립투쟁
1915년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서유럽으로 옮겨간 마사리크는 체크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에 대해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마사리크의 영국과 프랑스 친구들은 협상국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는 다음과 같은 체크인들의 정치목표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첫째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보헤미아의 독립을 회복한다. 둘째 체크와 슬로바키아의 통일국가를 설립한다. 셋째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한다.
넷째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완충지대(cordon sanitaire)를 설정하여 독일의 제국주의를 견제하는 일단의 신생국들을 수립한다.
1917년 러시아의 전제군주체제가 전복되자 러시아로 활동영역을 옮긴 마사리크는 전쟁포로들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을 조직하고 신생 공산정부와의 외교관계를 발전시켰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체크와 슬로바키아 거류민 단체의 환영을 받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 및 로버트 랜싱 국무장관과 만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조건을 협의했다.
그결과 1918년 5월 공포된 '랜싱 선언'에는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이 표명되었으며 윌슨 대통령은 〈전후(戰後) 평화를 위한 14개조〉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을 거론했다. 또한 슬로바키아인에게 대대적인 자치권을 인정할 것이라는 이른바 '피츠버그 협정'을 미국 내 슬로바키아 연합체들과 체결했는데, 훗날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정부는 이 해석을 둘러싸고 슬로바키아 야당세력과 심각한 마찰을 빚게 되었다.
1918년 6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는 협상국으로 인정되었고 마사리크의 구상에 따라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그가 약속했던 대로 신생 다민족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헝가리계 소수민족들의 권익을 존중했다. 1918년 11월 14일 마사리크는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20, 1927, 1934년에 이르기까지 4차례에 걸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진정한 해방자이자 국부(國父)로서 체크와 슬로바키아 정당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슬로바키아인들이 상대적 소수인으로 해서 발생하는 여러 위기들을 해결하는 데 골몰했다.
철학자이자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던 마사리크는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중부 유럽의 운명에 관하여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5년 1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약 2년 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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