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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다른 표기 언어 Marie-Antoinette 동의어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출생 | 1755년 11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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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3년 10월 16일 |
국적 | 프랑스 |
요약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프랑스의 국가 재정위기를 초래했다.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심은 1792년 8월 10일 왕정을 타도시킨 프랑스 혁명의 촉진제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딸이며, 1770년 프랑스의 루이 왕세손와 결혼했다. 자신이 총애하는 궁정 신하들과의 사교에 열심이었고, 이 과정에서의 막대한 궁정비 지출은 1770-80년대 프랑스의 부채에 한몫을 했다.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군대를 데리고 메스로 피신하라고 루이를 설득했고, 다시 그를 부추겨 국민의회가 봉건제도 철폐와 왕의 권력 제한을 위해 시도하던 일들을 저지시켰다. 파리에서 혁명세력의 인질로 잡혀있다 탈출하려다 부부 모두 체포되었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경박하고 무분별하고 방탕했으며 개혁에 적대적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1792년 8월 왕정 타도로 이어진 민중 소요사태가 일어나도록 자극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11번째 딸이었으며 1770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왕세손와 결혼했다. 루이는 내성적이며 따분한 성격의 무뚝뚝한 남편이었으므로 1774년 루이가 왕위에 오를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총애하는 경박한 궁정 신하들의 작은 모임에 어울려 사교에 열심이었다. 그녀의 방탕한 궁정비 지출은 1770, 1780년대에 프랑스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는 데 한몫을 했다.
또한 더욱 방탕한 궁정 귀족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혼외정사를 한다는 중상모략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비방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1785~86)의 와중에서 마리가 추기경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부당한 비난을 받았을 때 절정에 달했다(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 이 추문으로 왕실의 평판이 떨어졌고 귀족들은 루이의 대신들이 추진하던 모든 재무개혁에 열렬히 반대하게 되었다(1787~88).
이런 위기에 처해 마리는 그후의 위기상황에서처럼 남편보다 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 루이에게 군대를 데리고 메스로 피신하라고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해 8, 9월에는 루이를 부추겨 국민의회가 봉건제도 철폐와 군주의 절대권 제한을 위해 시도하던 일들을 저지하게 했다. 그결과 그녀는 민중 선동가들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녀가 백성들이 먹을 빵이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럼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Qu'ils mangent de la brioche!)라고 무감각하게 이 유명한 말을 내뱉었다고 몰아붙였다.
1789년 10월 민중들의 압력에 못 이긴 왕실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돌아와 혁명세력의 인질 신세가 되었다. 6개월 후 마리는 국민의회의 저명한 일원으로 왕정 복고를 희망하던 미라보 백작과 비밀리에 서신왕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라보를 불신했으므로 루이 왕이 미라보의 충고에 따르지 못하게 했다. 1791년 4월 미라보가 죽은 뒤로는 망명 왕당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6월 20일 밤, 왕과 왕비가 파리를 탈출할 수 있도록 주선했으나 이들 부부는 바렌에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어(6. 25) 파리로 송환되었다.
그뒤 그녀는 국민의회 안의 입헌군주파 지도자인 앙투안 바르나브와 비밀협상을 열어 급속히 약화되고 있는 국왕의 지위를 지탱해보려고 애썼다. 바르나브는 새로운 헌법(1791. 9)을 공개적으로 승인하라고 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빠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에게 프랑스에 대항해 반혁명 전쟁을 일으켜줄 것을 몰래 부탁해 바르나브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레오폴트 황제는 그녀의 청에 응하지 않았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뒤, 마리는 오스트리아와 계속 음모를 꾸며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샀다. 왕비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심은 1792년 8월 10일 왕정을 타도시킨 반란의 촉진제였다. 그뒤 그녀는 여생을 파리의 감옥에서 보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국민공회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고, 그해 8월 마리는 콩시에르즈리의 독실 감방에 감금되었다가 1793년 10월 14일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2일 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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