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에는 추기경을 지냈으며 최초의 발리도(valido：17세기말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들을 대신해 스페인을 통치한 총신)였다.

데니아 후작 4세의 아들로 삼촌 크리스토발 드 로하스가 대주교로 있던 세비야에서 성장했다. 펠리페 2세의 국왕 집무실에서 일한 그는 나중에 펠리페 3세가 된 왕위 후계자의 신임을 얻었다. 1598년 왕위에 오른 펠리페 3세도 그에게 공무집행을 맡겼으며, 1599년 그를 레르마 공작으로 임명했다.

펠리페 3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을 이용하면 어느 정도 유럽에서 스페인의 지배권을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은 그는 스페인 왕가와 빈의 합스부르크왕가 또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와의 결혼을 연속적으로 추진해나갔다. 1604년 영국과의 런던 강화조약을 체결했으며 1609년 네덜란드와는 12년 동안의 휴전을 성립시켰다(12년휴전조약).

35만 명에 달하는 모리스코(Morisco：형식적으로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어인)를 스페인에서 추방시키기 위한 칙령(1609∼14)을 발안했다. 경제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정치적·종교적인 동기에서 모리스코를 스페인 그리스도교도에 동화시킬 수 없다고 본 그는 과감한 방법을 동원해 분쟁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막대한 양의 개인 재산을 모았는데, 그의 정적들은 이 사실을 이용해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외아들 우세다 공작 크리스토발은 야심 많은 올리바레스 백작(나중에 공작)의 교묘한 술책에 넘어가 레르마를 겨냥한 음모에 가담했다. 그는 더이상 왕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 예상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1618년 3월 교황 파울루스 5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권력에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