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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75년에 걸쳐 일어난 푸가초프 반란의 영향으로 이 시기의 작가들은 농노제를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어 독자층이 늘어나고 모든 계층이 문학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수마로코프는 자신의 마지막 3편의 비극에서 지금까지의 전제군주제를 공격하고 계몽군주제를 옹호했다. 페늘롱의 〈텔레마크 Télémaque〉를 자유롭게 번안한 〈틸레마히다 Tilemakhida〉(1766)에서 트레디아코프스키는 모든 국민이 차르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차르 역시 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영국의 잡지 〈스펙테이터 Spectator〉를 모방해 잡지를 손수 편집했는데 이 잡지를 통해서 트레디아코프스키를 조롱했다.
이 시기의 가장 탁월한 작가는 극작가 데니스 이바노비치 폰비진과, 작가이자 잡지발행자인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노비코프였다.
폰비진은 젊어서 우화시를 번역했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풍자적인 우화시를 창작했다.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은 직후에 쓴 〈여우와 훈계자〉(1762)에서 그는 여제의 위선적인 조신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폰비진에게 극작가로서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2편의 산문 희극 〈여단장(旅團長) Brigadir〉(1783)〉·〈미성년 Nedorosl〉(1783)이었다. 노비코프도 폰비진처럼 풍자의 초점을 농노제 자체가 아닌 지주들의 권력남용에 맞추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소설가는 표도르 알렉산드로비치 예민이었다. 그의 걸작 〈에르네스트와 도라브라의 편지 Letters of Ernest and Doravra〉(1776)는 루소의 〈신 엘로이즈 La Nouvelle Heloïse〉를 자유롭게 번안한 작품으로 러시아 소설사에서는 최초로 보통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심리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층민 출신의 통속 소설가인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출코프는 독자를 즐겁게 하는 데 주력해 그의 소설에는 고전주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고상한 도덕적 설교를 찾아볼 수 없다.
고전주의의 쇠퇴 기미는 이폴리트 표도로비치 보그다노비치의 통속적인 설화시들, 특히 라 퐁텐의 〈프시케와 큐피드의 사랑 Les Amours de Psiché et de Cupidon〉을 마음대로 번안한 〈두셴카 Dushenka〉(1775)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감상주의 작가들은 보그다노비치를 자신들의 시조로 여겼다(감상적 소설).
고전주의에서 감상주의로의 전환을 가장 활발하게 표현한 작가는 18세기 러시아 최대의 시인 가브릴라 로마노비치 데르자빈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인 서정시와 송시에서는 로모노소프와 수마로코프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곧 사회악에 대해 독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메시체르스키 공의 죽음에 부치는 그의 송시(1779)는 인생무상과 죽음의 불가피성에 관한 명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 특유의 유쾌함으로 운명의 신을 맞아들이면서 끝을 맺는다. 데르자빈은 그후 10년 동안 최성기를 맞아 〈이스마일 함락에 부치는 송시〉·〈귀족에게 보내는 송시〉 등을 썼다. 그의 가장 훌륭한 시 역시 이 시기에 쓴 것으로 격조 높은 송시 〈폭포 Vodopad〉(1794)·〈공작〉 혹은 고대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의 전통을 따른 〈정찬에의 초대〉(1798)·〈즈반카의 생활〉(즈반카는 시인의 작은 영지 이름) 등이 있다.
데르자빈은 농노제를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시를 썼으나, 사실적인 필치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구어체를 도입해 시어를 단순화한 것은 시의 민중화에 힘쓴 것이라 할 수 있
1790년대의 러시아 문학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통일체로서의 국민의 역할을 주제로 제시했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라디시체프는 〈자유에 부치는 송시 Ode to Liberty〉(1781~83)에서 미국 혁명을 찬양하고 농노제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편으로 전제정치에 대한 탄핵이었기 때문에 예카테리나 2세는 이 시를 '반역적인 시'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 송시에서 황제를 처형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카프니스트의 유명한 희극 〈중상 Chicane〉(1793~98) 같은 격렬한 풍자물을 별도로 친다면 이 시기의 주류는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카람진을 필두로 하는 감상주의였다. 러시아 감상주의에서 주관적 감각은 고전주의적 추상화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연상태를 이상화하는 경향과 결합되어 있다.
카람진은 이성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에 맞서, 시란 감정의 표출이며 대상의 객관적인 가치 여하에 관계없이 작자의 주관적 체험이나 인생관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상주의자들은 더욱이 예술의 정서적 토대를 강조하면서 섬세한 감수성이 미적 인상의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했다. 데르자빈과는 달리 카람진은 현실 자체보다는 현실이 시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분위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시적 창조는 "지치고 슬픔에 잠긴 심정의 토로"였다.
카람진의 후기 시를 특징짓는 이러한 비가적 분위기는 그의 유명한 소설 〈불쌍한 리자 Bednaya Liza〉(1792)에 잘 표현되어 있다. 러시아 소설로는 처음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묘사 부분이 작품의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룬다. 카람진은 소설 〈율리아〉에서 전원생활과 '자연의 품'으로의 귀속을 이상화했다.
그의 다른 소설 〈본홀름 섬〉(1793)·〈시에라 모레나 Sierra Morena〉(1793) 등은 러시아 낭만주의 소설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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