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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베르지에
다른 표기 언어 Jean Duvergier de Hauranne 동의어 장-앙브루아즈 뒤베르지에 드 오란, Jean-Ambroise Duvergier de Hauranne출생 | 1581, 프랑스 바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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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43. 10. 11,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생시랑의 대수도원장이며 얀센주의 운동의 창시자.
리슐리외 추기경의 정책에 반대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벨기에 루뱅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성직자가 되어 파리에 정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옹호한 젊은 코르넬리우스 오토 얀센과 친해져서 스콜라 철학을 지지하는 루뱅의 예수회에 반대했다. 두 사람은 1611~16년 함께 공부한 후, 얀센은 루뱅으로 돌아갔고(1617), 뒤베르지에는 푸아티에 주교의 가까운 비서가 되어 그곳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을 만났다. 1618년 사제서품을 받고, 1620년에는 생시랑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뒤로는 보통 생시랑으로 불렸다.
투렌 서쪽은 프랑스 개신교의 본거지였으므로, 뒤베르지에는 위그노들을 반대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학문활동을 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에 맞게 개혁하려는 꿈을 가졌다. 이러한 열정 때문에 뒤베르지에는 곧 파리를 벗어나 1637년 베르사유 근처 포르트루아얄데샹에 있는 옛 수녀원에 '은수자'(Solitaires)로 알려진 단체를 설립했다.
파리에 있을 때는 유력한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그결과로 얀센주의를 지지한 아르노가(家)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페트루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필명으로 예수회의 근거 불충분한 공리설과 주교권위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공격했다. 이 일로 그가 공공연히 적대시했던 리슐리외 추기경을 화나게 하여 벳센 성에 투옥되어(1638. 5. 14) 죽을 때까지(1643) 갇혀 있었다. 다소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던 그에게서 당시의 많은 재판관들은 감명을 받았으나, 또다른 사람들은 일관성이 부족한 그에게 당황하기도 했다. 뒤베르지에와 같은 수준의 정신적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뜻을 분명히 설명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하나의 실질적인 종교부흥이었던 얀센주의의 영향은 그의 커다란 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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