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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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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16년을 보낸 뒤 데카르트는 1644, 1647, 1648년에 잠깐씩 프랑스에 돌아와 머물면서 〈철학의 원리〉·〈제일철학에 관한 성찰〉·〈반론과 응답〉의 프랑스어 번역을 감수했다. 1647년에는 가생디와 홉스를 만났으며, 기압 측정을 위해 퓌드돔 산에 기압계를 설치하는 실험을 파스칼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프랑스 재무장관 피에르 달리베르와 접촉하여 왕립대학에 기예 실습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1648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자 급히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의 에흐몬트로 돌아갔다.

1649년 데카르트는 클레르슬리에의 동생이자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엑토르 피에르 샤뉘의 주선으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궁정에 초대받았다. 데카르트는 매일 오전 5시에 크리스티나에게 철학을 강의했으며, 그녀의 명령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5막 형식의 희극 1편과 〈평화의 탄생 La Naissance de la paix〉이라는 무도회용 시를 썼는데, 이 시는 30년전쟁의 종결을 가져온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서 크리스티나가 한 역할을 칭송하고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글이었다. 이밖에도 스웨덴 학술원 설립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1650년 2월 1일 오전 5시 여왕에게 법안을 제출했을 때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다. 그 자신이 겨울이면 인간의 사고도 물처럼 언다고 말한 스웨덴에서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된 탓에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숨을 거두었다. 데카르트가 죽은 뒤, 경건한 가톨릭교도였던 클레르슬리에가 유고를 입수하여 선별 간행함으로써 데카르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윤색작업은 교부 아드리앵 바예가 1691년 방대한 데카르트 전기를 펴내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정말 그리스도교 교리를 지지하는 데 주된 관심을 쏟은 로마 가톨릭교 옹호론자였는지, 아니면 결정론적·기계론적·유물론적 물리학을 확립하면서도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보호한 무신론자였는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클레르슬리에와 바예가 이용한 데카르트의 많은 원고들이 현재로선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대답하기 어렵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1667년 데카르트의 유골이 파리 주느비에브뒤몽 성당에 안치되던 바로 그날에 그의 책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한편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들은 데카르트 생전에 줄곧 그를 예수회회원이자 교황예찬론자 즉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1930경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주요관심이 형이상학적 종교에 있었다고 믿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그가 태생이나 정치면에서 프랑스인이자 왕정주의자였다는 점에서 가톨릭교도였다고 믿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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