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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각가.
서양화가 인승이 친형으로, 형제가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형 인승이 193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유화과에 입학하자 2년 뒤 집안 식구들의 권유에 따라 같은 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도쿄미술학교는 서구화를 추진하던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 의해 1887년에 세워진 관립학교로서, 그는 조각과 학생으로는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한 뒤 1939년부터 〈여자의 머리〉, 〈목동〉·〈어떤 감정〉·〈여명〉 등 이른바 '시국색'을 띤 작품으로 특선에 올라 형 인승과 함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후 추천작가로서 젊은 여성이 노동에 맞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허리춤에는 물통을 차고 한 손에 발 밑에서 머리 위까지 가는 찍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을 한 〈제 4반〉이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국반원'인 여성이 '시국하의 총후'에 열성적으로 나선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렇듯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경향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형 인승과 함께 친일 성향의 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해방 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될 때 김경승은 형 인승과 함께 친일 전력이 문제가 되어 김은호·이상범(李象範)·김기창·심형구·윤효중과 함께 제외된 뒤 풍문여자고등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이순신과 안중근, 더글러스 맥아더 및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의 동상을 제작하며 동상 제작 전문가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본격적인 '동상 세우기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군인충혼탑, 국립경찰충혼탑, 안중근 의사 동상, 4·19기념탑, 세종대왕, 김구, 김유신, 정몽주, 안창호, 이상재, 전봉준 등 동상과 학교 설립자 동상들을 도맡아 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제5공화국 때는 평화통일정책자문위원을 지냈으며, 3·1문화상, 은관문화훈장(1982) 등을 받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형 인승과 함께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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