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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37(중종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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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9(선조 32) |
국적 | 조선, 한국 |
본관 | 안동(安東) |
시호 | 충장(忠莊) |
자 | 언신(彦愼) |
호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
요약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행주대첩으로 활약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 모악이며 선조 15년 46세의 늦은 나이에 식년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정자가 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지만 용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선조 26년 관군 2,300명과 처영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해 관민과 함께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선조 32년 전쟁이 끝난 후 노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사망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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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및 관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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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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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의 활동
출신 및 관직생활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모악. 아버지는 영의정 철이고, 어머니는 창녕조씨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46세 때인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좌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의주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행주대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전라도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과 함께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북진했다. 용인에서 일본군과 마주치자 권율은 우선 임진나루를 확보할 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전했다. 이후 광주에 되돌아갔다가 전라좌도도절제사로 임명되어 금산군 이치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크게 이기고 호남을 지켰다. 이 공으로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병마절도사 선거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 독왕산성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대군을 보내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를 굳게 하면서 유격전술로 맞서 이를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서울에 고립되었다.
1593년(선조 26) 2월에 선거이에게 5,000의 병력을 나눠주어 시흥 금주산에 진을 쳐 도성의 왜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관군 2,300명과 처영의 승병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했다. 이때 왜장 우키다가 지휘하는 3만의 적군이 7대로 나뉘어 맹렬히 공격했으나, 관민이 일체가 되어 싸워 적을 격퇴하고 크게 이겼다. 그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주둔했다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휴전상태가 되자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 행주에서의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으나, 도체찰사 및 순찰어사와의 불화로 말미암아 도망병을 즉결처단한 일이 빌미가 되어 1596년 해직되었다. 그러나 바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고, 충청도순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의 활동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후퇴를 거듭하다가 이순신이 적의 해군을 저지한 틈을 타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까지 남하하여 적과 맞섰으나, 사령관 양호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충돌을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선조 32) 노환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죽었다.
1604년 효충장의선무공신일등훈에 책록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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