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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인데 교황 율리우스 2세(줄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에 오게 되었고 이 모세 상은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난 뒤 묻힐 무덤에 쓰일 조각품이었다. 보통 교황의 무덤은 성당 안에 보존되고 그 무덤 위에 여러 조각품들을 만든다.
하지만 율리우스 2세는 한 때 미켈란젤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모세 상을 만들 때 미켈란젤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 보고자 토스카나 지방의 까라라 지역(대리석 산지)에 가서 7개월 동안 온 산을 뒤지고 다닌 뒤 돌아왔는데, 그 사이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는 여러 조각가들이 율리우스 2세에게 미켈란젤로를 모함하여 사이를 이간질해 놓았다. 이에 율리우스 2세는 1505년에 미켈란젤로와 크게 다투고 만다.
미켈란젤로는 본래 〈모세 상〉 크기의 조각 44개와 아울러 부조물 28개를 만드는 큰 그림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으나 결국 중도에 피렌체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율리우스 2세 교황은 브라만테라는 조각가 겸 건축가를 맘에 두고, 미켈란젤로를 파문하였지만 미켈란젤로의 뒤에는 이탈리아의 대부호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이후 1508년에 율리우스 2세의 사과와 아울러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된 미켈란젤로는 만들다 말았던 모세 상을 다시 손보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바티칸 시스틴 소성당의 천장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는 야구 선수에게 월드컵에서 뛰어달라는 청탁과 같은데···.(좀 더 자세한 내용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참조)
미켈란젤로가 미완성 상태의 모세 상을 다시 손보게 된 것은 1545년 그의 나이 70세 때였다. 이미 그때는 너무 고령이어서 예전에 구상했던 44개의 조각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시점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바로 이 〈모세 상〉을 처음 만들기 전인 1504년에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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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본 콘텐츠는 2015년 10월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정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글
1972년생. 한양대 국문학과, 한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 졸업하였다. 1997년 이탈리아의 시에나로 유학, 2006년에 오페라 연출(Regia dell'Opera), 공연연출(Promo..
출처
찬란한 문명과 유적을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 알찬 이탈리아 여행을 위한 최신 가이드를 소개한다. 추천 여행코스부터 주요 관광지의 핵심 여행 정보까지 특별한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