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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한국 근
현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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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발행 공립신보(1908년 10월 28일)

목차

  1. 기사 원문
    1. 척식위원 귀국
  2. 해설

기사 원문

공립신보 190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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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식위원 귀국

일본척식회사 한국위원 이건혁, 이근배 등 33명은 9월 24일에 귀국하여 고본금각주1) 모집에 종사한다더라.

병영 이설각주2)
일본군사령부는 새로 건축한 영사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다더라.

정액각주3) 하기를 청원
척식회사 위원들은 회사 자본금을 정액하기로 한일정부에 청원하였으며 고본금 모집처소는 모두 110곳인데 일본에 70곳이요, 한국에 40곳의 사무 관리소를 둔다더라.

해설

1908년 12월 설립된 동양척식회사는 일제의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 기구의 하나였다. 말인즉 황무지를 개간해 식량을 증산하기 위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실제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민을 돕기 위한 조직이었다. 한 꺼풀 더 벗겨보면 일본의 퇴역 군인들을 조선으로 이주시켜 본국의 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조선의 민족운동을 감시 억압하고 경제를 착취하려는 목적이었다.

설립과 동시에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토지를 인계 받고 매수에도 힘써 1910년 무렵엔 서울 여의도의 100배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다. 그 대부분을 일본인 농업이민에 대여했고, 조선인 소작인에게는 50퍼센트가 넘는 고율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데 이게 한일합작회사였단다. 일본 고위 관리와 통감부 직원은 물론 경성 거주 조선인 실업인 · 귀족들이 합작해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설립했다. 기사는 이 회사의 자본금 모집에 나선 한국 측 인사들의 동정을 다뤘다. 나라야 흥하든 말든 민중이야 어찌 살든 제 잇속만 챙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꽤 있었던 모양이다.

동양척식회사가 어찌나 성공적이었는지 일제는 1921년 만주로 이민 가는 조선인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만선(滿鮮)척식주식회사를 세우는 등 다른 식민지로 확장했다. 이에 따라 1917년 본점을 경성에서 도쿄로 옮기고 정관을 고쳐 한국인 부총재의 임명을 사실상 봉쇄하는 등 본색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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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했고, 기자생활을 하며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을 마쳤다. 1983년 기자생활을 시작, 한국일보, 중앙경제, 중앙일보, 동아일보사 등에서 일했다. 중앙일보사 문화..

출처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1면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사 | 저자김성희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신문 기사를 통해 우리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더듬어 보았으며, 우리 근현대사가 오늘날 살아 숨 쉬는 사건으로 되살아나도록 구성, 편집, 해설을 하였다.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부터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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