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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고조의 병사
고조 8년 한왕(유방) 신의 잔당을 토벌하고 장안으로 돌아온 고조는 소하가 건축 중인 미앙궁(未央宮)의 장려함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소하를 꾸짖었다.
“천하가 흉흉하여 오랫동안 전화에 시달렸고 아직도 그 성패를 알 수 없는데, 무슨 궁전을 이렇게 장려하게 짓는단 말이오?”
소하는 정중히 아뢰었다.
“천하가 아직 미정한 상태에 있을수록 장려한 궁전을 지어 새로운 지배자의 힘을 널리 과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 힘을 실물을 통해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천자는 사해를 집으로 삼기 때문에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이보다 더 훌륭한 궁전을 지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조는 할 말이 없었다.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장안은 진의 수도였던 함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함양은 위수 북쪽에 위치해 있고 장안은 위수 남쪽에 있다. 위수 북쪽에 있던 함양은 모두 항우가 불을 질러 타버렸고 다행히 위수 남쪽에 있었던 진나라 때의 별궁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보수만 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던 상태였다. 그 별궁은 진나라 때는 흥락궁(興樂宮)이라 불렀는데 고조는 장락궁(長樂宮)이라 개명하고 우선 이곳에서 정사를 돌보기로 하였다. 이 장락궁의 규모는 주위 8킬로미터 정도로 그 안에 신궁(信宮)·장추전(長秋殿)·영수전(永壽殿)·영녕전(永寧殿)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각주1)
그러나 진나라의 퇴물인 별궁만으로는 새로운 왕조의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소하는 장려한 미앙궁을 지었던 것이다. 장락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그 가운데 40여 부속 건물이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물론 소하가 완성시킨 것은 그 일부로 전전(前殿)·북궐(北闕)·동궐(東闕), 그리고 무기고·식량창고 정도였다. 전전은 정면이 110여 미터, 깊이가 30여 미터, 높이가 80여 미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조는 계속 장락궁에서 거처하였다.
일찍이 경포가 모반했을 때 고조는 병이 심하여 사람 대하기를 싫어하였다. 금중(禁中)에 누워 있으면서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명하기를 “군신들을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주발(周勃)과 관영 등은 10여 일 동안이나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번쾌는 다짜고짜 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대신들도 번쾌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고조는 홀로 한 사람의 환관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 군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옛날 폐하께서 신 등과 함께 패 땅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할 때는 그 얼마나 기력이 왕성하였습니까?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는데 무슨 병으로 이렇게 고생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어찌 진나라 때 조고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고조는 웃으며 일어났다. 그 뒤 연왕 노관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번쾌를 시켜 연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때 고조는 병들어 있었다. 고조의 병상에는 고조가 사랑하는 척부인파의 환관이 척부인의 지시를 받아 여후가 낳은 태자 영을 폐하고 척부인이 낳은 여의를 빨리 태자로 책립해야 한다고 은근히 충동질하고 있었다.
여후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고 있는 번쾌는 척부인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척부인파에서는 번쾌를 제거하기 위해 그를 참소하여 말하였다.
“번쾌는 여씨의 일당입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황상께서 유고하시는 날에는 번쾌는 즉시 군대를 끌고 와서 척부인과 조왕 여의의 무리를 모두 죽여 없앨 것입니다. 번쾌는 지금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노관을 치지 않고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있다 합니다.”
고조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성내어 “진평과 주발을 부르라.” 명하였다.
진평과 주발이 대령하자 “주발은 번쾌를 대신하여 장수가 되고, 진평은 번쾌를 잡아 당장에 군중에서 베어 죽여라.” 하였다.
진평과 주발은 상의하여 번쾌를 먼저 죽이지 않고 함거에 싣고 일단 장안으로 연행한 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고조에게 맡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고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거에 실려 장안으로 돌아온 번쾌는 석방되고 작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은 여후에게로 넘어갔다.
처음 고조는 경포 토벌에 나섰다가 빗나간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은 후 병세가 날로 악화되었다. 고조가 살아 있을 때 태자 책립 문제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던 척부인파에서는 더욱 집요하게 고조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조의 마음은 더욱 척부인의 아들 여의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고조가 태자를 바꾸려 한 것은 단순히 척부인을 총애해서가 아니라 현재 태자로 책립된 영이 너무 유약하기 때문에 창업 초기의 한제국을 그에게 맡긴다는 것이 매우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고조의 속마음을 안 장량이 간하여 고조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나 고조는 쉽게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천자의 고문격인 숙손통은 태자 폐립의 문제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다.
“옛날 춘추 시대 진헌공은 사랑하는 여희 때문에 태자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세움으로써 수십 년에 걸쳐 진나라가 어지러웠고, 진나라는 일찍 부소를 태자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고가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태자로 세워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였음은 폐하께서도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께서 어질고 효성스러움을 천하 백성들이 다 듣고 우러러 받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굳이 적자인 태자를 폐하고 다른 왕자를 태자로 세우시려면 먼저 신의 목을 베십시오.”
완고하고 변통 없는 숙손통이 고금의 예를 들어가면서 간하니 고조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희롱삼아 한 말일 뿐이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하였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천하가 모두 흔들리는 법입니다. 어찌 천하로써 희롱하려 하시옵니까. 천부당 만부당하오이다.”
태자 폐립 문제에 대하여는 장량·숙손통뿐 아니라 대신들 가운데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조는 군신들의 마음이 모두 조왕 여의에게 없음을 깨닫고 있었으나 그래도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 폐립 문제로 고심하던 여후가 그녀의 오빠 건성후 여석지를 시켜 장량에게 계책을 문의한바 일찍이 고조가 아무리 초청해도 나오지 않았다는 네 사람의 현자를 초빙하는 방법을 장량이 넌지시 가르쳐주었다.
여택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사람을 시켜 태자의 정중한 편지를 받들고 그들을 맞으니 네 현인은 모두 태자의 초빙에 응해 은신처에서 나왔다. 이들 네 현인은 우선 건성후의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고조와 군신들이 모두 모이는 연회가 열려 태자 영이 그 연회장에 들어갈 때 이들 네 현인이 모두 태자를 모셔 연회장에 따라 들어섰다.
네 사람 모두 나이는 80여 세이고 머리도 눈썹도 수염도 눈처럼 희었다. 의관은 거룩해 보였으며 고고한 기풍은 흡사 이 세상 사람 아닌 신선같이 느껴졌다.
연회장의 많은 시선이 이들 네 사람에게 모아졌다. 황제도 괴이히 여겨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오?” 하고 물었다.
네 사람이 앞으로 나가며 이름을 말하고 인사를 올렸다.
“신은 동원공(東園公)이라 아룁니다.”
“신은 녹리선생(甪里先生)이라 아룁니다.”
“신은 기리계(綺里季)라 아룁니다.”
“신은 하황공(夏黃公)이라 아룁니다.”
네 노인의 이름을 들은 고조는 크게 놀랐다. 이 네 현인이야말로 고조가 천하를 평정한 뒤 어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차례 초빙하였으나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던 인물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대들을 찾았으되 나오지 않고 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내 아이를 따르고 있는가?”
“폐하께서는 선비를 업신여기시고 꾸짖기를 좋아하시니 신 등은 의로써 욕됨을 받지 않으려고 황공하옵게도 피했사옵니다. 지금 태자 영은 성품이 어질고 인품이 뛰어나 선비를 아낄 줄 아시므로 천하 백성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그 분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는다 하옵니다. 이 분이야말로 저희들이 섬겨야 할 명군이라 생각되어 스스로들 나와 이렇게 모시고 있는 것이옵니다.”
네 현인이 말하였다. 고조는 네 노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그대들은 오래오래 태자를 지키고 보좌하라.” 하였다.
네 노인이 하례의 인사를 올리고 물러가자 고조는 이들을 목례로 전송하면서 척부인을 불러 이들 노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나는 태자를 바꾸려고 했었소. 그러나 태자 영을 저 네 현인이 보좌하고 있으니 이젠 깃과 날개가 다 돋아났소. 움직일 수 없으니 단념하시오.”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된 척부인은 울음을 터뜨렸다. 고조는 척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척부인에게 초의 춤을 추게 하고 자신은 초의 노래를 불렀다. 그 가사가 《사기》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실려 있다.
홍곡 높이 날아
단숨에 천리를 가도다
깃과 날개가 이미 돋아나
사해를 가로지르도다
사해를 가로지르는 것을
진정 어이하리
증작이 있다 한들
맞힐 수가 없도다
鴻鵠高飛 一擧千里
羽翮已就 橫絶四海
橫絶四海 當可奈何
雖有矢矰繳 尙安所施
태자 영의 곁에는 네 현인이 있어 날개가 이미 돋아나 사해를 날고 있다. 아무리 좋은 활이 있어도 살은 이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고조는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불렀으나 척부인은 흐느껴 울 따름이었다.
결국 고조가 태자를 바꾸지 않은 것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이들 네 현인을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 후 고조의 병세는 더욱 중태에 빠졌다. 여후가 명의를 불러 치료하려 하자 고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였다.
“내 평민의 몸으로 석 자 칼을 잡고 천하를 차지했으니 이 또한 천명이 아니겠소. 이렇게 병들어 쓰러진 것도 또한 천명이오. 사람의 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비록 편작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치료는 필요 없소.”
그리고는 황금 50근을 주어 명의를 돌려보냈다. 고조도 자신의 생명이 다했음을 짐작하고 있었고 여후 또한 이를 짐작하였다.
여후는 후계자 문제를 걱정하여 고조의 의중을 떠보았다. 태자 문제는 이미 확정되었으므로 대신의 후계자 문제였다.
“소상국도 나이가 많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누가 대신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조참에게 맡기시오.”
그러나 조참 또한 고령이었다. 여후는 그 다음 차례를 물었다.
“왕릉이 가하지만 조금 우직하니 진평으로 하여금 그를 돕도록 하시오. 진평이 비록 지모가 많으나 단독으로 국사를 담당하기는 어려우니 정치는 왕릉·진평 두 사람에게 맡기고, 주발이 중후하고 소박하지만 유씨를 편안히 할 사람은 주발일 것이니 이 사람에게 군사적인 일을 맡기어 태위(大尉)각주2) 를 삼도록 하시오.”
여후는 또 다음 차례를 물었다. 그러자 고조는 “그 후 문제는 당신의 알 바가 아니오.”라고 말끝을 흐렸다. 자꾸 다음 차례를 물으니 고조는 ‘도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살려고 그러는가.’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죽음에 임박한 고조가 국사를 담당할 대신들의 이름을 댈 때 장량은 제외되어 있다. 장량은 일찍이 고조가 천하를 평정하고 낙양에서 잠시 머물다가 장안으로 도읍이 옮겨지자 고조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온 후부터 신선이 되기를 원하여 곡식을 끊고 있었다. 천하가 평정되어 조국 한나라에 대한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물러나고 싶어하였다.
“원컨대 인간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각주3) 를 따라 놀려고 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인간사에 미련이 없었다.
장량이 신선이 되기를 원한 것은 일종의 보신책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실 고조는 천하를 차지한 뒤 장도·한신·한왕(유방) 신·팽월·경포, 그리고 예외라고 인정했던 죽마지우 노관까지도 숙청하였다. 심지어는 노관 토벌군의 총사령관인 번쾌까지도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지모가 뛰어난 장량은 이 같은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고조와 여후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논공행상이 있을 때 고조는 장량의 수훈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대는 마음대로 제나라 땅에서 3만 호를 골라 가지라.”
그러자 장량은 “신이 하비에서 처음 일어나 폐하와 만났으니 이것은 하늘이 신을 폐하에게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채용하시어 다행히 시운이 맞아 천하를 얻으신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유 땅에 봉해지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3만 호라는 말씀은 가당치도 않습니다.”라고 하여 인간 세상의 부귀와 공명에 뜻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장량은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일축하여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장량은 숙청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후 적송자를 따라갔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아무리 행운을 타고난 고조 유방도 죽음만은 면할 수가 없었다. 재위 12년(기원전 195) 여름 4월 갑진일에 장락궁에서 고조는 영면하였다. 재위 12년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한왕(유방)이 된 때부터 계산한 것이고 항우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된 해로부터 따지면 8년밖에 안 되니 새로운 왕조의 발족 단계에서 죽은 셈이다.
새로운 왕조가 서면 당연히 새로운 법령과 제도, 예악 등을 정비해야 하는데 고조의 주변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고조를 비롯하여 그의 주위 인물들은 모두 하층 계급 출신에 불과하였고 군사인 장량만이 재상가 출신이었으나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이미 한나라가 멸망하여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일찍이 고조가 군신들을 모아놓고 건국의 대축하연을 벌였을 때 술에 취한 군신들이 서로 공을 다투어 마침내는 칼을 빼어 기둥을 찍는 등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져 연회장은 엉망이 되었다.
군신간의 예의 따위는 아랑곳없이 황제가 된 유방에게도 무뢰배끼리의 의리 정도로 알고 있는 버릇 없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이들 버릇 없는 인간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까?”
고조는 자신의 오만무례한 품위 없는 행동을 생각하면서 이를 근심하였다.
숙손통은 고조가 그런 것을 몹시 싫어함을 알고 진언하였다.
“대체로 유생이라는 것은 함께 진취하는 것은 어려우나 이루어진 것을 함께 지킬 수는 있습니다. 신은 노나라의 유생들을 불러다가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식을 제정하겠습니다.”
숙손통은 진나라 때 문학으로 박사가 되어 2세 황제의 궁정에 출입한 자였다. 숙손통의 진언을 들은 고조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겠는가?” 물었다.
“신은 고대의 예와 진나라의 의식을 참고하여 그것을 시세와 인정에 맞게 만들고자 합니다.”
“시험삼아 해보되 다만 알기 쉽고 내가 능히 행할 수 있나를 헤아려서 만들도록 하라.”
고조는 윤허하였다.
이에 숙손통은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어 유생 30여 명을 불러오게 하여 임금의 좌우에서 학문하는 자와 그의 제자들 백여 명과 함께 야외에 면체(綿蕞)각주4) 를 설치하여 예를 익혔다.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폐하께서 시험삼아 한번 보시옵소서.” 하고 숙손통이 아뢰었다.
예를 행하는 것을 본 고조는 “이만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이 예법을 10월부터 조정에서 실시하게 하라.” 하고 군신에게 명하였다.
고조 7년 장락궁이 이루어지자 제후와 군신들이 모두 입조하여 10월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전하에는 공신·열후·장군·군리들이 차례에 따라 서쪽에 늘어서서 동쪽을 향하고, 문관은 승상 이하 차례대로 동쪽에 늘어서서 서쪽을 향했다. 이에 황제가 연을 타고 방을 나오면 제후왕 이하 녹봉 6백 석에 이르는 관리가 어전에 인도되어 차례로 조하를 받들어 올렸다.
조하의 예가 끝나자 다시 법주(法酒, 의식의 술)를 마련하여 놓고 신하들이 전상에서 모시고 앉는데 모두 엎드려 머리를 숙이고 지위의 고하에 따라 일어나 황제에게 헌수하였다. 조회를 마치고 술잔치를 벌였는데 감히 떠들고 실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고조는 만족하여 “내 오늘에야 비로소 황제가 존귀하다는 것을 알았다.”하여 기뻐하였다.
아마도 숙손통이 이 조정의 의식을 제정하기 전에는 황제로서도 제장들과 마주앉아 말을 주고받고 했던 것 같다. 이것도 창업에 얽힌 하나의 이야기이다.
또 황제로서의 존엄을 길이 유지하기 위하여 일찍이 논공행상에 의하여 왕으로 봉했던 공신이나 장군들을 숙청하였으며 장차 국가의 통치에 유리한 조치의 일환으로 왕자나 왕족들을 제후로 임명하였다. 또한 재상인 소하 등과 더불어 일련의 법령과 제도를 제정하여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봉건 왕조를 세웠다.
초기의 봉건 왕조는 정치적으로는 통일되었으나 경제면에서는 붕괴 상태에 있었다. 원래 진왕조의 폭정에 의하여 농민들은 기아를 면치 못하여 짐승들의 옷을 입거나, 개·돼지의 먹이를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그 후 농민 봉기에 이은 8년간의 전쟁에 의하여 농토는 황폐화되고 난을 피하여 유랑하는 백성들이 산야에 가득하였다.
진나라 때 3천만이었던 인구가 한대 초기에는 650만으로 감소되었다고 하며 곡역성(曲逆城, 하북성 완현동남)은 진나라 때 3만 가구였던 것이 한대 초기에는 5천 가구로 감소되어 있었다.
일찍이 고조가 백등에서 흉노에게 7일간 포위되었다가 진평의 기계(奇計)를 써서 풀려나자 남으로 곡역성을 지나면서 “내가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보았으되 내 마음에 드는 곳은 오직 낙양과 이 곡역뿐이다.”라고 극구 칭찬하고 6차례에 걸쳐 기계를 내어 고조를 위기에서 구출했던 진평을 곡역후로 임명했던 바 있다.
이처럼 살기 좋은 고장인 곡역성이 이 정도로 황폐하였다면 당시의 경제 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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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 이런 중국을 지탱해주는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