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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진나라의 흥망

진승오광의 난

불타오르기 시작한 반란의 불꽃

시황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황제(호해)는 시황제처럼 재능과 포부도 없이 오로지 잔인포악한 정치만을 일삼았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베어 죽이고 22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 그 일족까지 암살, 혹은 차열형(車裂刑)각주1) 으로 죽였다. 나중에는 승상 이사까지도 요참형(腰斬刑)각주2) 으로 죽였다.

요컨대 진왕조의 내부 모순은 갈수록 점점 더해져 반란의 불씨만 보이면 순식간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를 기세에 이르고 있었다.

시황제가 죽은 다음해(기원전 209) 하남성 양성 사람 진승(陳勝)과 양하 사람 오광(吳廣) 등 9백 명이 징용되어 고향을 떠나 북쪽 변방인 어양(漁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양은 현재의 북경 부근이다. 어양의 성 쌓는 일과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목적지인 어양까지 가는데 인솔 대장 밑에 이들 일행을 보살피는 둔장(屯長)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진승과 오광이 둔장을 맡게 되었다.

이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 지금의 안휘성 동남)에 이르렀을 때 큰 장마가 계속되어 길이 막혀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떠날 때 모월 모일까지 목적지에 도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지정된 날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진나라 법에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참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일행은 모두 참형을 당해야 할 공동 운명에 놓여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대로 어양에 간다 해도 기일이 늦어 죽음을 면할 수 없고 도망친다 해도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한 번 큰 이름이나 내고 죽는 것이 사나이의 취할 바가 아니겠는가? 진승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온 천하 백성들은 포악한 진나라의 학정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만약 우리들이 진나라 타도의 깃발을 높이 쳐들면 각지의 백성들은 이에 호응해 올 것이 확실하다.’

오광은 진승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동하였다. 이로써 이들 두 사람의 반란 계획은 확정되었다.

오광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인솔 책임자를 설득하였다.

“어양에 가 개죽음을 당하기보다는 모두 마음을 합쳐 살 방법을 찾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장은 오광의 말을 듣기는커녕 술이 곤드레가 되어 오광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일벌백계로 오광을 한 번 때려서 여러 사람에게 본때를 보일 심산이었으나 도리어 대중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오광은 그 대장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잽싸게 그 대장의 목을 보기 좋게 베어버렸다. 그 순간 또 한 사람의 대장의 목이 진승의 손에 의해 날아가버렸다.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진승은 여러 사람에게 부르짖었다.

“우리들은 모두 기한을 어겼소. 어양에 가도 참수될 것이고 요행히 참수를 면한다 해도 변방의 부역에 종사하게 될 것이오. 부역에 종사했다가 사고 없이 고향에 돌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소. 어차피 죽을 바에야 한 번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왕후와 장상(將相)이 어찌 따로 씨가 있겠소. 우리들도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일동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나무를 꺾어 무기를 만들고 장대를 세워 깃대를 삼았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봉기라 할 수 있다. 이 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진승과 오광은 자기들이 공자 부소와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라 사칭하고 단을 모으고 맹세를 마친 후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가 되어 서쪽으로 진(陳,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에 진출하였다. 대택향에서 진까지 진출하는 동안 이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반진(反秦) 장병들이 속속 가담하여 전차 6, 7백 량, 기병 1천여 명, 보병 수만 명이 집결하였다. 진승·오광은 이들 병력을 거느리고 손쉽게 진성(陳城)을 공격, 점령하였다.

진승·오광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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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에는 명사로 이름난 무신(武臣)과 장이(張耳)·진여(陳餘)라는 사람이 있어 진승·오광은 이들 지식인을 참모로 삼아 휘하에 거느렸고 또 항연의 부하였던 주문(周文)이라는 사람도 가담시켰다.

진 땅의 호걸과 부로(父老)들이 한결같이 진승에게 초왕이 되기를 권하였다. 진승이 이 문제를 장이·진여에게 물으니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저 진나라는 무도하여 남의 나라를 빼앗고 남의 사직을 전멸시켰으며 남의 후세를 끊고 백성의 힘을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장군께서는 한 번 살기조차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잔학한 진나라를 제거하려고 하십니다. 지금 처음으로 진에 와서 왕이 된다면 천하에 사심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왕이 되시지 마시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들어가 사람을 보내어 6국의 후손으로 하여금 왕이 되어 뒤를 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장군은 자기 편의 당을 만들고 진나라로서는 적을 늘리는 것이 됩니다. 적이 많아지면 힘이 나누어질 것이고 당이 많아지면 병력은 증강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포악한 진나라를 토멸하고 함양에 웅거하여 제후들을 명령하면 제업(帝業)은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승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부로들의 권유에 따라 초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고 하였다. 역사상으로는 진승이 왕이라 칭한 곳의 이름을 따 진왕(陳王)이라고도 한다. 진승은 오광을 가왕(假王, 대리왕)으로 임명하여 함께 진나라 토멸 계획을 의논하였다.

장초가 일어나 진승이 왕을 일컬었다는 소문은 어두운 밤에 높이올라간 횃불처럼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진왕조 타도의 봉화가 높이 타올랐다. 각지의 백성과 장병들은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켜 다투어 진승에게 호응해왔다.

당시 초나라 지방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무장 집단이 여기저기 있었기 때문에 진왕에게 호응해오는 군사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어느덧 수십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진왕은 군사 작전에 익숙하다는 주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토록 하였다. 주문은 함곡관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파죽지세로 대군을 진격시켜 진나라 수도 함양 동쪽 50킬로미터 지점까지 육박하는 데 성공했다.

당황한 진의 2세 황제(호해)는 이때서야 비로소 위급함을 깨닫고 급히 명령을 내려 여산 기슭에서 부역에 종사하던 수십만 명의 죄수를 방면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주어 장한(章邯)으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게 하여 주문의 군대와 싸우도록 하였다.

주문의 군대는 여기저기서 모여든 오합지졸인데다가 너무 깊숙이 무계획하게 진나라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장한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함곡관까지 후퇴하였다. 주문은 즉시 진왕 진승에게 패전 소식을 전하고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증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고립 상태에 빠진 주문의 군대가 계속 장한군에 패하자 책임을 느낀 주문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한편 무신·장이·진여는 진왕의 명령으로 북쪽으로 올라가 조나라를 평정하였다. 진왕은 조나라를 평정하고 그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진나라를 공격할 계산이었다. 그러나 무신은 조나라를 평정하자 스스로 조왕이라 칭하고 진여는 대장군, 장이는 승상이 되었다. 진왕은 조나라를 점령한 무신에게 군사를 서쪽으로 진격시켜 진나라를 공격하라고 독촉하였다.

그러나 조왕이라 칭한 무신에게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만약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와 싸우면 많은 병력의 손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질는지 이길는지도 모르지만 만약 이긴다 해도 그의 군대는 만신창이가 될 것이니 결국은 손해다. 공격할 만한 곳은 서쪽인 진나라가 아니라 동쪽의 연나라이다. 그 이유는 진나라는 자기들의 본거지를 침략해오는 군대를 필사적으로 맞아 싸우려고 할 것이며 연나라는 이미 진나라에 멸망당한 나라이므로 나라 잃은 백성이 누구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려 하겠는가. 잘 하면 조나라에서 오는 군대를 해방군으로 맞이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와 연나라가 합세하면 그 형세가 매우 강성하여 진왕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이것이 무신의 계략이었다.

장이·진여는 천하에 알려진 명사로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자취를 감추자 시황제가 열심히 찾던 인물이었다. 장이에게는 1천 금, 진여에게는 5백 금의 현상금이 걸려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신과 함께 천하의 정세를 먼저 판단하고 계략을 정했던 것이다.

조나라·연나라가 합세하여 북쪽의 대 땅에 웅거하면 진왕 진승이 지배하는 초나라와 그 세력이 대등하게 된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쳐 이긴다 해도 겁날 것이 없으며 초나라와 진나라가 싸움을 벌여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무너져버린다면 그때야말로 조·연의 세력이 천하를 장악할 가능성마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조왕을 자칭한 무신과 장이·진여는 이런 계산 밑에 한광(韓廣)이란 자를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에 파견했다. 예상대로 연나라는 아무 저항 없이 한광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장이·진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연나라의 유력한 세도가들이 장군 한광을 연왕으로 추대하자 한광은 연왕이 되어 독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자 자신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게 되니 일치단결하여 진나라를 격멸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그 위에 조왕 무신은 하찮은 일로 죽임을 당하고 장이와 진여도 사이가 나빠졌다.

장군 전장(田藏)은 가왕 오광이 교만하고 용병에 어둡다는 이유로 오광을 죽여 그 머리를 진왕 진승에게 보냈다. 그러자 진왕은 전장을 영윤(令尹)에 임명하였으니, 진승·오광 하면 마치 일심동체처럼 여겼던 두 우두머리 사이에도 거센 대립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진나라 장군 장한은 승세를 몰아 진격을 계속하여 진성(陳城)에 육박하였다. 진승은 고군분투, 끝까지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할 수 없이 하성보(下城父, 지금의 안휘성 와양현)로 퇴각하여 분전하던 중 진승을 가장 가까히 모시던 어자(御者) 장가(莊賈)가 진승을 죽이고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러자 진승의 접객 주임(接客主任)으로 있던 여신(呂臣)이 일단 함락되었던 진성을 다시 탈환하여 장가를 죽이고 그 원수를 갚았다.

진승·오광의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연 선구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진승이 진조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든 후 진성을 점령하고 왕이라 일컬은 것은 겨우 6개월에 불과하였으며 그가 죽은 해는 기원전 208년이었다.

진승은 죽은 후 현재의 하남성 영성현 망탕산 밑에 묻혔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그의 묘 인근에 있는 30호를 묘지기로 배정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묘는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이 잡초에 뒤덮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영성현 사람들은 그의 묘를 수축하고 커다란 석비를 세워 그의 선구적 용단을 추모하였다.

망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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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 이런 중국을 지탱해주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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