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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장평의 싸움

長平大戰

제나라와 진나라가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동안 조나라는 그 북방에 있는 호족(胡族)들로부터 말타는 기술과 활쏘는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싸움에 알맞은 호족들의 복장을 본떠 새로운 전투복을 만들고 여러 가지 군사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급속도로 국력이 강대해졌다.

제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자 이제 조나라가 진나라와 패권 다툼을 벌일 정도로 그 세력이 쟁쟁하였다. 이렇게 조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진 것은 상대부(上大夫) 인상여(藺相如)와 장군 조염파(趙廉頗)가 충성과 지략으로 조의 혜문왕(惠文王)을 보필하였기 때문이었다.

조나라 혜문왕 때에 초나라의 화씨벽(和氏璧)각주1) 을 얻었는데 진의 소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진나라의 15성과 바꾸자고 제의하였다.

조왕은 대장군 조염파와 여러 대신들을 불러놓고 의논하였다.

“진왕이 비록 15성과 바꾸자고 하나 그것은 한낱 속임수에 불과하오. 화씨벽을 주지 않으려고 하면 막강한 진나라 군대가 공격해올지도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목현(繆賢)이라는 신하가 말하였다.

“신의 사인(舍人) 가운데 인상여라는 자가 있사오니 그를 불러 하문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에 왕이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왕이 자기 나라의 15성과 화씨벽을 바꾸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상여가 대답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씨벽만 빼앗고 성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진나라가 성과 화씨벽을 바꾸자고 하는데 조나라에서 거절하면 잘못이 조나라에 있고, 조나라가 화씨벽을 주었는데도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차라리 허락하여서 잘못된 책임을 진나라에 지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누구를 사자로 보내는 게 좋겠는가?”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 신이 가겠습니다.”

이에 조왕이 인상여에게 화씨벽을 받들고 진나라에 가게 하였다.

상여가 진나라에 들어가 화씨벽을 받들어 진왕에게 올리니 진왕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조나라에 성을 보상할 의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그 벽옥에 흠이 있습니다. 신이 그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왕이 의심하지 않고 벽옥을 내어 주자 상여는 벽옥을 손에 넣고 물러나 기둥에 기대 섰다. 그때 상여는 머리털이 갓을 밀어올릴 만큼 성이 나서 진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선 벽옥과 성을 바꾸자고 하셨습니다. 신이 대왕께 벽옥을 바쳤으나 대왕께선 신을 대하는 예절이 매우 거만할 뿐 아니라 성을 보상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다시 벽옥을 가져왔습니다. 대왕께서 끝내 신을 협박하여 벽옥을 빼앗고자 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벽옥과 함께 기둥에 부딪쳐 부서질 것입니다.”

상여는 벽옥을 가지고 기둥을 노려보며 벽옥을 기둥에 들이치려고 하였다. 진왕은 상여가 벽옥을 깨뜨릴까 두려워 사과의 뜻을 표하고 담당 관리를 불러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서부터 15성을 조나라에 주라.”고 명령하였다.

상여는 진왕의 속마음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거짓말로 성을 주는 체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진왕에게 말하였다.

“화씨벽은 천하가 다 아는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조왕께서 벽옥을 보낼 때 5일 동안 재계하셨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도 마땅히 5일 동안 재계하고 빈객을 대접하는 예를 베푸십시오. 그런 연후에야 신이 비로소 벽옥을 올리겠습니다.”

진왕은 끝내 강제로는 벽옥을 빼앗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드디어 5일 동안 재계하겠다고 하고 상여를 객관에 머무르게 하였다.

상여는 객관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수행원을 누더기 옷으로 변장시켜 그 벽옥을 가슴에 품고 사잇길로 도망하게 하여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진왕은 5일 동안 재계를 마치고 빈객의 예를 베풀어 상여를 맞이하였다. 상여는 들어가 진왕에게 말하였다.

“진나라는 목공 임금 이래로 강한 세력만 믿고 다른 나라와의 약속을 굳게 지킨 일이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대왕께 속아 조나라 임금의 명령을 저버리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벽옥을 조나라에 돌려보냈습니다. 진나라가 먼저 15성을 조나라에 베어 준다면 조나라가 어찌 감히 벽옥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기만한 죄로 마땅히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왕과 군신들은 서로 보며 놀라고 성을 내었다.각주2) 좌우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상여를 끌고 가려고 하자 진왕이 말하였다.

“지금 상여를 죽이면 끝내 벽옥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조나라와의 우호 관계가 끊어질 것이니 그를 후대하여 돌려보내도록 하라.”

상여가 조나라에 돌아오자 조왕은 그의 벼슬을 높여 상대부(上大夫)로 삼았다. 그 뒤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쳐서 석성(石城)을 빼앗고 그 다음해에 또 조나라를 공격하여 2만 명을 죽였다.

기원전 279년 진왕은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어 화친하자는 명목으로 민지(澠池)에서 회담하자고 제의하였다. 조왕은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염파와 상여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만약 가지 않으시면 조나라는 약하고 또 비겁하다는 약점을 보이게 됩니다.” 하였다.

이에 조왕은 상여를 수행원으로 삼아 회담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진왕과 민지에서 만나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진왕이 먼저 말하였다.

“조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시어 비파를 잘 타신다 하니 한 곡조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왕이 비파를 한 곡조 타니 진나라의 어사가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과 회담하고 조왕을 시켜 비파를 타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인상여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신이 듣자오니 진왕께선 진나라의 음악을 잘하신다 합니다. 조왕께선 비파를 타셨으니 대왕께선 부(缶)각주3) 를 한 번 쳐주시기 바랍니다.”

진왕이 매우 불쾌히 여겨 부 치기를 거절할 눈치를 보이자 상여가 말하였다.

“대왕과 신과의 거리가 불과 다섯 걸음 안이어서 신의 목의 피를 대왕께 뿌릴 수 있습니다.”

진왕을 모시고 있던 좌우의 신하들이 상여를 칼로 찔러 죽이려 하자 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좌우가 쓰러지듯 기가 죽어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진왕은 할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부를 한 번 쳤다. 상여가 돌아보며 조나라의 어사를 불러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부를 치다.’라고 쓰게 했다.

진나라의 군신들이 “조나라는 15개 성을 바치어 진왕의 만수무강을 송축하시오”라고 청하자 인상여는 “진나라는 함양(咸陽)을 바치어 조왕의 만수무강을 송축하시오.”라고 응수하였다.

진왕은 회담을 마쳤으나 끝내 조나라를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조나라 또한 군비를 강대하게 하여 방비를 굳게 하니 진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조왕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자 상여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벼슬을 높여 상경(上卿)으로 삼으니 그 지위가 염파보다 높았다. 염파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조나라의 장수로서 성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는데 인상여는 한낱 입과 혀만을 놀렸을 뿐이다. 또 상여는 원래 천인 출신인데 나보다 지위가 높으니 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내 상여를 보면 반드시 그에게 창피를 주리라.”

상여가 이 말을 듣고 조회 때마다 번번이 병이라 일컫고 염파와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았다. 외출했다가 길에서 염파가 오는 것을 보면 수레를 끌고 피해 숨었다.

상여의 사인(舍人)들이 이 광경을 보고 상여에게 말하였다.

“염파가 나쁜 말을 한 것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다니시는 것은 너무 지나치십니다. 용렬한 사람도 부끄럽게 여길 일이온데 하물며 장상(將相)의 지위에 계신 분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제 하직하고 가겠습니다.”

인상여가 그들을 만류하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염 장군과 진왕 중 누가 낫다고 생각하는가?”

“진왕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하였다.

“그런 진왕의 위엄 앞에서도 상여가 조정에서 꾸짖어 그 군신들을 부끄럽게 하였는데 상여가 비록 노둔하다 하나 어찌 염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는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두 범이 서로 싸우면 그 형세는 둘이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피하여 다니는 것은 국가의 위급한 일을 우선으로 하고 사사로운 다툼은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가시 회초리를 짊어지고 인상여의 문에 나가 사죄하여 말하였다.

“소인이 비천하여 대인의 관대하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로 화합하여 문경(刎頸)각주4) 의 벗이 되었다.

민지는 지금의 하남성 민지현으로 지금도 진나라와 조나라가 회맹한 고적이 보존되어 있다.

민지의 회담이 있은 지 9년 후에 진나라는 군대를 동원하여 조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에게 대패하였다. 그로부터 8년 후인 기원전 262년에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또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장평(長平)에서 조나라 군사와 대치하였다. 이때 조나라에서는 혜문왕이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였으며 장군 조사도 이미 죽고 인상여는 병이 위독하였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하여 진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자주 조나라의 군대를 깨뜨렸고 조나라 군대는 방비를 튼튼히 하여 나가 싸우지 않았다. 조나라 장수 염파는 백전노장이었다. 진나라 군대는 멀리 원정해 있으므로 결전을 서두르리라는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급히 공격하려는 진나라 군대를 느긋하게 지키면서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 사기를 꺾으려는 작전이었다. 이러한 상태가 3년 동안 계속되니 진나라는 예상 밖의 많은 군사비를 소모하게 되었다. 한없이 기다릴 수만 없다고 판단한 진나라에서는 이간책을 썼다.

“염파는 나이가 늙고 겁이 많아 싸우려 하지 않고 있다. 진나라에서 무서워하는 것은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 군대는 그날로 무너질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조왕은 원래 염파가 겁이 많고 싸우지 않는다 하여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조괄로 장수를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 병석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인상여가 간하였다.

“왕께서는 명성만 듣고 조괄을 쓰십니다. 그러나 조괄은 거문고 기둥에 아교풀을 칠하여 고정시켜 놓고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다만 그의 아버지 조사가 남긴 글을 잘 읽었을 뿐이고 임기응변(臨機應變)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조왕은 듣지 않고 조괄을 장수로 삼았다.

조괄은 소년 시절부터 병법을 배워 스스로 천하에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하였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사와 병사를 논한 일이 있었는데 사는 그의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잘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괄의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으니 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싸움이란 사지(死地)다. 그런데 괄은 그것을 쉽게 말하니 조나라에서 만약 그 아이를 장수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사는 괄 때문에 깨질 것이다.”

괄이 장수가 되어 떠나려고 할 때 그의 어머니가 왕에게 상소하여 말하기를 “괄을 장수로 하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그 연유를 물었다.

“조괄은 조사와 부자지간이지만 그 마음쓰는 것이 아주 다르옵니다. 남편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친한 벗이 몇십 명이나 되옵고 벗으로 사귀는 사람은 몇백 명이나 됩니다. 나라에서 상금을 내리시면 그것을 모두 군사와 사대부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나라에서 명령을 받은 날에는 집안 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하루아침에 장수가 되자 군리(軍吏)들이 그를 우러러볼 수 없을 만큼 거만하오며 왕께서 내리신 금품과 비단은 모두 창고에 두었다가 날마다 전답을 살펴보아 그것을 사들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괄을 장수로 삼지 마시옵소서.”

“이 일은 내 이미 결정하였으니 어머니는 괘념치 마십시오.”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을지라도 첩을 연좌(連坐)시키지 않겠습니까?”

왕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허락하였다.

진왕은 조괄이 조나라 장수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자 비밀리에 백기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왕흘(王齕)을 비장(裨將)으로 삼은 후 군중에 영을 내려 백기가 상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조괄이 염파를 대신하여 장평에 이르자 군중의 약속을 모두 고치고 군리(軍吏)의 보직도 변경하였으며 지금까지 취해오던 수비 위주의 작전에서 공격 체제로 바꾸었다.

진나라 장수 백기는 그 소문을 듣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거짓 패하여 달아나 뒷길로 돌아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조나라 진영을 포위하였다. 조나라 군사는 기습군이 패하여 달아나자 그 승세를 몰아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이 견고하고 방비가 튼튼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가 46일 동안 계속되니 보급로가 끊긴 조나라 군사들은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괄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스스로 돌격을 감행하였다가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맞아 죽으니 조나라 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40만 명이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백기는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어린 군사 240명만 살려 보냈다.

다음해에 진나라의 군대는 드디어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1년 여의 포위 끝에 거의 함락되기 직전에 초나라·위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겨우 포위를 풀게 할 수 있었다. 이 한단의 포위를 풀게 한 세 사람의 주역은 전국 시대의 사군으로 이름 높은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이었다. 사군 가운데 가장 현명하기로 이름 높은 이는 맹상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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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 이런 중국을 지탱해주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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