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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한조연초의 형세
진나라와 함께 왕을 칭한 한나라는 칠웅 가운데서도 가장 약소국이었다. 인구도 적고 산업도 부진하였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었으며 위·진·초 등 강대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때문에 수도를 평양(平陽)·신정(新鄭)·양책(陽翟) 등으로 자주 옮겨야 했다.
이러한 한나라가 신불해(申不害)라는 천민 출신의 명재상을 등용함으로써 15년 동안 그 융성을 자랑하였다.
신불해는 상앙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한 법가였으나 사마천은 신불해의 학문이 황제·노자로부터 나왔다 하여 노자·장자·한비자(韓非子)와 함께 취급하고 있다.
신불해는 《신자(申子)》라는 저서를 남겼다고 《사기》에 기술하고 있으나 그 저서는 일찍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전국책(戰國策)》이나 《한비자(韓非子)》의 기술 가운데서 그 윤곽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신상(申商)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학문은 상앙과 비슷하였으나 상앙은 법치주의자로 특히 법률을 중요시한 데 반하여 신불해의 학문은 제왕학(帝王學)에 가까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제왕학이란 군주가 될 사람이 배워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신하가 배웠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법률 지상주의의 상앙은 법률을 내세워 엄연한 자세를 취한 데 비하여 신불해는 지나치게 군주를 의식한 나머지 항시 군주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를 취했다. 신불해가 임기응변에 능했던 것은 아마도 군주의 의향에 따라 자기의 태도를 바꿔야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원칙을 내세우지 않고 군주의 의향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소후(韓昭侯)의 재상으로서 재임하는 동안 내정·외교에 실책이 없이 한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재상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한나라에서 신불해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신불해는 상앙보다 1년 늦게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한나라에 비하여 같은 삼진의 나라인 조나라는 매우 개성적인 나라였다. 조나라는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쪽의 여러 민족과 교섭이 잦았고 이로 인하여 중원에서는 특이한 풍속의 나라로 여겨졌다. 수도는 진양으로부터 한단(邯鄲)으로 옮겨야 했다. 조나라는 남쪽으로 위나라와 제나라 등 강대국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북방으로 진출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적(狄)이 세운 중산국(中山國)이 조나라의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흉노(匈奴)·누번(樓煩)·임호(林胡) 등의 부족이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조나라는 개척과 이민에 의한 북진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소공(召公) 석(奭)을 먼 조상으로 하는 연(燕)나라는 계(薊, 지금의 북경)를 수도로 정하였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원 여러 나라와의 전란에 휘말리지는 않았으나 산융(山戎) 등 변방 부족의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연나라는 역사 무대에 기록할 만한 사건·사변이 없이 근 1세기 반 동안을 지내왔다. 혹시 기록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해도 산융 등 변방 부족들이 중원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전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일부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
춘추 시대 한때 패자로서 이름을 떨친 바 있는 남쪽의 초나라는 전국 시대에 이르러 월나라를 멸망시켜 합병하고 다시 운남(雲南)을 정벌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초나라의 판도는 나머지 6국을 합한 넓이와 맞먹을 정도에 이르렀으나 그 영토에 비하여 그 세력은 그다지 강성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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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 이런 중국을 지탱해주는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