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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융성
초나라 목왕은 곰의 발바닥을 먹고 싶다던 아버지 성왕의 마지막 소원마저 받아들이지 않은 혹독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금의 하남성의 강(江)과 욱(蓼), 안휘성의 육(六) 등의 약소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다시 북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목왕은 재위 14년에 죽고 그의 아들 여(侶)가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춘추 오패의 한 사람이라 불리는 초의 장왕(莊王)이다. 장왕 즉위 8년에 낙수 동쪽에서 육혼(陸渾)의 융(戎)을 공격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주나라 정왕(定王) 원년(기원전 606)의 일이다. 당시 초나라가 제도(帝都) 근처에서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자 주왕실에서는 초의 장왕에게 위로 사절을 보낼 정도로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 파견 사절로 간 주나라 대부 왕손만(王孫滿)에게 초의 장왕이 구정(九鼎)의 무게를 물은 일은 역사상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구정이란 천자의 상징으로 하(夏)·은(殷)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다. 이 보물에 대한 무게를 묻는데는 “구정을 우리 초나라로 가져가고 싶은데 무게가 얼마나 되느냐?”의 속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주나라 왕실을 얕잡아보고 왕자의 자리를 협박하는 언동임에 틀림없었다.
“천명은 아직 주나라에 있습니다. 솥의 무게는 묻지 마시오.”
왕손만은 사색이 되어 이렇게 대답했다. 초의 장왕의 눈에는 그따위 상징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주왕실에서는 비록 구정을 가지고 있지만 제왕의 권위 따위는 땅에 떨어져 있지 않은가?” 장왕은 왕손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지 마시오. 초나라에서는 부러진 창의 끝으로 구정을 만들기에 족하오.”
무력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초의 장왕 17년(기원전 597) 초나라가 북진을 개시하자 가엾은 건 정나라였다. 3개월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정의 양공은 윗옷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고 양을 끌고 항복하였다. 윗옷을 벗는 것은 항복한다는 뜻이고 양을 끄는 것은 요리인이 되어 상전을 섬기겠다는 뜻이라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진(晋)에서는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남하하고 있었다.
남하하는 도중에 정나라가 마침내 초나라에 항복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진나라 진영에서는 구원하려는 상대가 이미 항복했으니 그대로 회군하자는 주장과 패자의 나라로서 끝까지 초나라와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주전론자들이 일방적으로 진군하는 바람에 전군이 그쪽으로 휩쓸리게 되었다. 진나라 군영은 삽시간에 대오를 잃고 우왕좌왕 전투 태세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초의 장왕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군에 총공격 명령을 내리니 진군은 대패하였다. 이 전투는 황하의 남쪽 언덕 필(邲)에서 있었다. 진나라 군대는 황하의 북쪽 언덕에 있다가 패하여 장병이 모두 일제히 도망가기 위하여 다투어 배에 올라탔다. 뒤늦게 뱃전에 오르려고 하자 먼저 배에 탄 자들이 그들의 손가락을 칼로 탁탁 쳐 배에 못 오르도록 하니 손가락이 배안에 가득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정원을 무시하고 많은 인원을 무조건 태웠다간 배가 전복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없었던 진나라의 큰 패전이었다. 게다가 이 대전에서는 이미 초나라에 항복한 정나라가 초나라와 합세하여 진나라와 싸웠으니 구원하러 간 상대와 싸운 셈이 된다. 이 승전으로 초의 장왕은 패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면 진나라와 싸워야 했고 또 진나라에 복속하면 초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였으니 강대국 사이에 끼인 약소국의 비극이었다.
진나라에 대승을 거둔 초의 장왕은 그 후 6년 만에 죽고 공왕(共王)이 즉위하였다.
초나라에 대패하여 한때 의기소침했던 진나라는 북방의 강적 적(狄)을 격멸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만회하였다.
진의 여공(勵公) 6년(기원전 575)에는 언릉(鄢陵)의 싸움에서 초나라를 대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초의 공왕은 눈에 화살을 맞고 패주하였다. 이 싸움에서의 승리로 진나라는 다시 패자의 꿈을 꾸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패자가 될 만한 강력한 제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晋)과 초(楚)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齊)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이른바 4강의 시대로 접어들고 그 사이에 끼인 약소국들은 형세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우왕 좌왕하는 현상을 연출했다.
얼마 후 진(晋)나라는 초나라에 인접해 있는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오나라를 지원하여 초나라와 싸우게 하는 작전을 폈다. 기원전 584년 진나라에서는 오나라에 군사(軍師)를 파견하여 병법과 전술을 가르치며 후원하니 마침내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의 포문이 열렸다.
한번 전쟁이 시작되자 그칠 줄을 몰라 1년에 7회를 거듭 싸울 정도로 치열해지니 초나라의 군대는 피로에 겹쳐 다시 북진할 힘이 없었고 진나라 또한 국내 문제로 남하할 여력이 없어 긴장완화를 바라는 움직임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에 송나라 대부 향술(向戌)이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제창하여 우선 초나라와 진나라의 양해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기원전 546년 송나라 수도에서 14국의 대부가 참석한 가운데 마침내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정전협정이 성립하였다. 이 평화회담을,‘미병(彌兵)회담’이라고 부르는데 미(彌)는 ‘그친다’는 뜻이니 정전회담이란 뜻이 분명하다.
이 회담을 전환점으로 하여 춘추 시대의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 제후들이 내세웠던 왕실을 존중한다는 존왕(尊王) 사상은 사라지고 전국 시대의 특색인 실력주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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