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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패자의 교체
환공의 출생 연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의 나이를 알 수 없고 따라서 그가 즉위한 해에 몇 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으나 꽤 나이가 들은 후의 일로 짐작된다. 그는 재위 43년(기원전 643)에 죽었는데 그의 전성기는 역시 규구에서 회맹을 가졌던 즉위 35년의 일이다. 그는 확실히 패자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중원 천하를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다.
우선 규구의 회맹을 예로 들어 본다면 남방의 대부분 제후들은 모두 참가를 해왔으나 초(楚)나라는 참가하지 않았고 북방 최대의 강국으로 알려졌던 진(晋)도 회맹에 가던 도중 주나라 사자와 만나 그의 말을 듣고 본국으로 되돌아간 일이 있었다. 서쪽의 진(秦)은 그 당시 별로 강대국이 아니었는데도 참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규구의 회맹에는 원래의 중원에 해당하는 제후가 참가하는 데 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히 말해서 환공이 천하의 패자였다고 말하기에는 좀 부족한 감이 있고 패자로서의 기반은 있었으나 아깝게도 연령적으로 무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제나라에 망명해 있던 중이는 후에 명실상부한 천하의 패자가 되었는데 그도 나이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환공이 연령적으로 무리였다고 말하기보다는 관중이 죽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환공은 일찍이 거(莒)로 망명해 있었다. 망명해 나그네 생활을 하다 보면 고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견문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환공은 그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태자 소(昭)를 송(宋)의 양공에게 보내어 맡긴 일이 있었다.
송은 은나라 후손이 봉해진 나라였고 양공 또한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태자를 유학시키는 데는 그 이상 안성맞춤인 나라가 없을 것으로 환공은 판단했던 것이다.
제나라와 송나라는 인접한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그토록 우호관계가 깊은 나라였기 때문에 규구의 회맹 때는 양공이 겨우 즉위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기 전이었는데도 부랴부랴 참가했던 것이다.
환공이 태자 소를 송나라에 보내는 데는 관중의 진언 때문이었다. 관중은 태자가 국내에 있으면 별로 좋은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음 대를 이을 태자이기 때문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를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유익함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던 관중이 환공보다 앞서 죽었다. 관중을 잃은 환공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절제를 잃었다.
관중이 죽기 전에 절대로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세 사람을 등용하여 측근에 두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제 자식이라도 죽여 국을 끓여 바치겠다는 요괴스러운 역아(易牙), 망명해온 위(衛)의 공자 개방(開方), 출세를 위해 자진해서 거세하고 환자(宦者)가 된 수조(豎刁) 세 사람이다.
환공이 규구의 회맹에서 맹약한 다섯 가지 조항 가운데에 ‘태자를 바꾸지 말 것’이라는 첫째 조항이 있다. 일세의 호걸 환공도 나이가 늙고 병들자 요괴스러운 역아의 아첨에 판단력이 흐려졌음인지 자신이 제후들에게 명하여 철석같이 약속한 맹약을 어기고 말았다.
환공은 여자를 좋아하여 세 사람의 정실(正室)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을 두고 있었다. 세 정실에게서는 아들이 하나도 없었고 첩의 소생으로 십여 명의 아들이 있었다. 모두 정실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후계자로서의 자격 요건으로는 모두가 평등하였다. 태자를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분쟁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관중은 환공과 상의하여 자질이 뛰어난 정희(鄭姬)의 소생 소를 태자로 삼아 송나라에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무궤(無詭)를 낳은 장위희(長衛姬)가 환공의 측근인 세 사람의 간신들과 짜고 늙은 환공을 꼬여 자기 소생인 무궤를 태자로 세웠다.
환공이 죽자 역아는 즉시 궁중에 들어가 환관 수조와 합세하여 반대파 대신들을 죽이고 무궤를 환공의 후계자로 옹립하였다.
이를 본 다른 공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부터 다섯 사람의 공자는 자기 세력을 결성하여 다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제나라의 기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환공의 장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후계자의 자리 다툼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환공의 유해는 입관도 못한 채 67일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악취가 진동하고 시충(尸蟲)이 여기저기 기어다닐 정도였다.
송나라에 가 있던 태자 소가 귀국하여 자기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아무리 무궤를 태자로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간신들이 병석에 있는 아버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무효이다.”라고 강력히 공박하였다.
그러나 이미 궁중에는 무궤파의 세력이 강대하여 아무도 태자 소의 주장을 옳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낀 소는 다시 송나라로 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춘추 오패는 그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 다르지만 누가 보아도 반드시 오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제의 환공과 진의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환공 말년에 제나라로 망명해온 중이다. 제환(齊桓), 진문(晋文)은 패자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다.
다음에 유력한 패자는 초의 장왕(莊王)이다. 이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문헌에서 오패로 들어가 있으나 유독 《한서》의 ‘제후왕표서주’에는 빠져 있다. 그러나 초의 장왕도 ‘제환·진문’과 아울러 패자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진(秦)의 목공(穆公), 송의 양공이라 주장하는 설과 월왕 구천, 오왕 부차라는 설이 대등한 관계에 있어 이들에 대해서는 패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준패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
첫 번째의 패자 환공이 그의 죽음에 의해 몰락하고 진의 문공이 다음 패자로서 출현하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송의 양공이 준패자로서 잠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송의 양공은 제나라와의 유대관계로 인해서 제나라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고 있었다. 송의 양공이 태자 소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송의 양공으로서는 소를 부탁받은 일도 있고 해서 소를 환공의 후계자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사태는 빗나가 엉뚱하게 무궤가 후계자로 즉위하고 소는 다시 송으로 망명해오는 신세가 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규구의 회맹 때 송의 양공은 부친의 상중이면서도 이 회맹에 참가하였는데 “천하의 일은 집안일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한 것이나 평소의 행동으로 보아 다분히 이상주의자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송의 후계자 자리를 그의 형 목이(目夷)에게 사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목이는 정비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형이면서도 태자가 될 수 없었다. 목이는 인격이나 식견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는 형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의견은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하고 마침내 양공이 즉위하였다. 양공이 즉위하자 곧바로 목이를 재상으로 등용했다.
양공은 규구에서 맹약한 두 가지 사실을 헌신짝처럼 버린 제나라를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었다. 태자를 바꾸지 말 것, 대부(대신)를 함부로 죽이지 말 것, 이 두 가지 맹약을 제나라는 여지없이 짓밟아버렸다. 태자를 무궤로 바꿔치기 하고 역아 일파가 반대파 대신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 위에 태자 소는 자신이 맡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양공은 제후의 군사를 규합하여 태자 소를 제나라로 돌려보내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후의 군사라야 모두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패자인 제나라는 이들 연합군과 힘써 싸우려 하지 않았다.
송을 맹주로 하는 연합군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는 이를 물리칠 힘이 없었다. 군대는 많았지만 이를 지휘할 유능한 장군이 없었다. 군대도 장군도 한낱 간신배들이 정권을 뒤흔드는 꼴이 역겨워 힘써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간신배들이 옹립한 무궤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사기가 저하된 군대는 쓸모가 없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침공해온 군대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무궤를 죽이고 말았다. 무궤가 살해되자 태자 소가 자동적으로 즉위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 송의 양공은 연합군을 이끌고 서둘러 귀국하였다.
그러나 후계자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네 공자가 각각 당파를 조직하여 분쟁을 일으키니 소는 다시 송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소가 송나라로 다시 망명해온 것이 3월의 일이고 양공이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네 공자의 군대를 격파하고 소를 즉위시킨 것이 5월의 일이었다. 이때 즉위한 소가 바로 제나라의 효공(孝公)이다. 환공의 장례는 8월에 이르러 효공에 의해 겨우 치러졌다.
제나라 후계자 전쟁에 개입하여 성공을 거둔 양공은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제의 환공에 이어서 천하의 패자가 되어 자기의 이상주의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려 하였다.
양공의 이 같은 야망을 눈치챈 목이는 그 부당함을 간하였다.
“패자가 되는 일은 제나라와 같이 강대국이어야 합니다. 만약 송과 같이 작은 나라가 패자가 되려 한다면 제후들이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군의 이상은 값진 것이오나 패권 다툼은 매우 위험한 일이오니 화를 자초하지 마시옵소서.”
양공은 듣지 않았다.
제의 환공이 죽은 지 4년 후(기원전 639) 양공은 맹주가 되기 위하여 봄에 녹산(산동성)에서 예비 회담을 갖고 그 해 가을에 회맹하기로 결정하였다. 예비 회담 때 제나라와 초나라는 송나라를 맹주로서 인정한다는 양해가 있었다. 가을의 회맹은 우(盂, 하남성)에서 열려 초, 진(陳), 채(蔡), 정(鄭), 허(許), 조(曹) 등의 제후가 참가했으나 초나라는 송의 양공을 포로로 하는 한편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그 해 12월 박(毫)에서 제후 회담이 열려 송의 양공은 겨우 석방되었다.
송의 양공은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이를 거울삼아 패자가 될 욕망을 버렸다면 후환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양공은 이를 갈며 언제고 이 치욕을 씻어야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다음해 여름, 송의 양공은 마침내 정(鄭)에 공격을 개시했다. 송에 복속해 있던 정나라가 모르는 사이에 초나라에 항복한데다가 초나라는 전에 자신을 감금하여 평생 잊지 못할 치욕을 안겨준 원수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러한 초나라에 항복한 정나라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목이는 간했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가을이 되자 초나라는 예상대로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내왔다. 양공은 이제 초나라 군사와 싸워야만 했다.
“하늘은 송나라를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의 도움 없이 강대국인 초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승산 없는 싸움은 그만두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목이는 애가 타 침이 마르도록 간하였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자기를 감금하고 욕을 보였던 지난날의 치욕을 생생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마침내 송군과 초나라 군사는 홍수(泓水)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게 되었다.
홍수는 지금의 하남성을 흐르는 강으로 송나라의 영역이었다. 호북의 장강 연안을 본거지로 했던 초나라는 점점 하남성 쪽으로 세력을 뻗어 송나라의 바로 발밑까지 점령해왔으니 송나라로서도 어차피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 홍수의 대전에서는 송나라가 패하였다. 이 승부전은 매우 독특한 승부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는 군사력이 워낙 강대하여 송나라가 정면으로 대결했다간 승산이 없었다. 이 점을 간파한 송나라는 홍수를 사이에 두고 대진하였던 것이다. 도하 작전을 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이 도하 작전에서는 먼저 강을 건너는 편이 불리하게 되어 있다. 강을 건너는 사이에 저격을 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초나라는 원체 병력이 많은지라 이를 믿고 먼저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송나라의 목이는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아 적의 허점을 노려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양공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초나라 군사는 도강을 완료하여 대오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목이는 적군이 대오를 완전히 정비하기 전에 공격하라고 하였으나 역시 출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윽고 초나라 군사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포진하였다.
양공은 이때서야 겨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승패는 이미 결정지어져 있었다. 중과부적으로 송나라 군사는 대패하고 양공의 좌우를 호위하는 친위대까지도 전멸하였다. 양공도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양공을 원망하자 양공이 대답한 말을 《춘추좌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군자는 부상자를 공격하지 않으며 늙은이를 포로로 하지 않는 법이다. 좁은 길목이나 강 가운데서 이기려 하는 것은 옛 어진 사람들의 취한 바가 아니다. 내 비록 망국(亡國)각주1) 의 후예지만 대오를 정비하기 전에 공격 명령을 내리는 그따위 치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목이는 탄식하였다.
“병법이란 이기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 전쟁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군자는 부상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다면 애당초 전쟁을 벌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 해에 망명 생활로 유랑했던 진(晋)의 공자 중이가 송나라에 왔다. 양공은 20필의 말을 중이에게 주어 우대하였다.
양공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다음해 여름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양공의 이상주의를 ‘송양(宋襄)의 인(仁)’이라고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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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 이런 중국을 지탱해주는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