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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패자의 시대
제13대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의 시대를 서주 시대라 하고, 도읍을 옮긴 때부터 37대 난왕(赧王)이 진(秦)나라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의 514년간을 동주(東周) 시대라 하며, 이 동주 시대를 다시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눈다. 춘추 시대는 평왕이 도읍을 옮기던 기원전 770년부터 진(晋)나라 대부 위사·조적·한건이 그들의 라이벌인 지백(智伯)을 없애고 그 땅을 3분한 후 제후로 봉함을 받은 기원전 403년까지의 368년간을 말하고, 전국 시대란 춘추 시대 이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말한다.
춘추 시대란 명칭은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역사 기록을 기본으로 해서 편찬했다는 연대기인 《춘추》에서 유래한 것이고, 전국 시대란 명칭은 전한 말기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한다.
이 춘추 시대는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의 위력을 잃고 서주 시대의 문물 제도는 차차 무너져 제후들은 서로 싸움을 일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약육 강식의 시대이다. 또한 고대부터 황하의 유역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중국 민족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려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정신 세계에도 반영되어 고대의 전통적 노예 제도가 무너지고 봉건 사회가 확립되는 이른바 신구 사회 제도가 교체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는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나라가 120여 국으로 줄어들었다가 마침내 큰 나라로 병탄되어 나중에는 제(齊), 노(魯), 정(鄭), 송(宋), 조(曹), 진(晋), 초(楚), 진(陳), 채 (蔡), 연(燕), 위(衛), 진(秦) 등 10여 개국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
이들 가운데 유력한 강대국을 춘추오패(五覇)라 칭했는데 제(齊)나라 환공(桓公), 진(晋)나라 문공(文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오(吳)나라 부차(夫差), 월(越)나라 구천(句踐) 등이다.각주1)
이들은 작은 제후국들을 단결시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물리쳤다.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覇者)는 제나라 환공이었다.
제나라는 주나라 창건의 일등공신 태공망 여상이 봉해진 나라로 자손들이 뒤를 이어왔다. 환공이 패자로서 인정받은 것은 환공 7년(기원전 679) 제후들을 지금의 산동성 복현에 소집하여 맹주(盟主)로서의 힘을 자랑하던 때로 태공망 시대로부터 370년 이후의 일이다.
환공의 아버지 희공(僖公)은 태공망으로부터 13대째이며 그에게는 제아(諸兒)·규(糾)·소백(小白)의 세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제아는 이미 태자로 봉해져 있어 왕위는 당연히 제아가 이어받도록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소백(나중의 환공)은 자기의 스승이며 자문역을 맡고 있는 포숙아(鮑叔牙)에게 “나는 꼭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포숙아는 깜짝 놀라 환공의 입을 막으려 했다. 포숙아는 환공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환공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그런 말을 하게 된 이면에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분별없는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내 형이 차마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소이다.”
“그게 무슨 일인데요?”
“그건 말할 수 없소이다.”
당시 제나라는 국력이 약했을 뿐 아니라 남녀 간의 풍기도 매우 문란했던 모양이다.
희공의 큰아들 제아는 자기의 친누이인 문강(文姜)과 연애관계에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근친상간이다.
어느 날 소백은 우연한 기회에 형님과 누나가 연애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소백의 눈에 띄었다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백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치가 떨렸다. 이후 누나 문강은 노나라 임금에게 시집을 갔다. 이 일을 아는 것은 소백과 그의 스승 포숙아 두 사람뿐이었다. 그때 소백의 아버지 희공은 그의 동생 이중년(夷中年)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이중년이 일찍 죽자 동생의 아들을 태자인 제아와 똑같이 대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백과 그의 형 규는 아버지의 이와 같은 처사가 매우 못마땅하였다. 규는 환공의 형으로 태자인 제아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때 마침 규의 스승이 은퇴하게 되자 포숙아가 관중(管仲)을 추천하였다. 얼마 후 제나라 환공이 패자로서 천하제후에 군림하게 된 것은 이 두 사람의 공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관포지교(管鮑之交)각주2) 의 주인공이다. 그들은 다정한 친구 사이였는데 관중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번 돈은 거의 다 관중이 차지하였다. ‘관중은 가난하니까’ 하고 포숙아는 조금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어느 때 포숙아가 자금을 대고 관중이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장사도 유리할 때가 있고 불리할 때가 있는 법’이라 하여 실패의 책임을 관중에게 돌리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나라의 시성 두보(杜甫)도 당시 사람들의 경박하고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음을 한탄하여 “그대들은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모르는가”라고 하여 이들의 우정을 칭찬하였다.
이 두 사람은 각각 망명한 공자 중 한 사람씩을 섬기게 된 것이다. 포숙아는 거(莒)로 망명한 소백을, 관중은 노(魯)로 망명한 규를 섬기게 되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지만 후에 누가 제나라의 주인이 되더라도 서로 대립하지 않고 비호해주기를 이심전심으로 약속했던 것이다.
기원전 697년 희공이 죽고 태자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양공(襄公)이다.
양공이 즉위하여 맨 먼저 한 일은 사촌동생 무지((無知)에 대한 지나친 대우를 폐지시킨 일이다.
태자 때부터 자신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 무지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고 특별대우를 취소당한 무지는 무지대로 불평을 하게 되었다.
소백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사촌인 무지를 이용하여 형 양공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을까?
포숙아에게 상의했으나 포숙아는 고개를 저었다. 소백은 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노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과 함께 제나라로 근친한 것은 양공이 즉위한 지 4년째, 시집간 지 15년이 지난 해였다. 그런데도 양공과 문강은 15년이나 만나지 못했던 정염이 타오르듯 다시 사련을 불태웠다.
문강의 남편은 그것을 눈치챘고, 여러 가지로 조사해본 결과 그들의 불륜 관계는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물론 시집가기 전부터의 과거까지도 다 알게 되었다.
문강의 남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에잇, 더러운 것! 당장 죽여 버릴 테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튕겼다.
문강은 오빠에게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양공은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완력이 뛰어난 그의 아들 팽생을 시켜 문강의 남편을 죽이라고 명했다.
양공의 명을 받은 팽생은 술에 취한 문강의 남편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늑골을 부러뜨려 감쪽같이 죽이고 노나라 사람들에게는 급한 병에 걸려 손쓸 사이도 없이 죽었다고 통보했던 것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감쪽같이 죽였다고 하지만 비밀은 탄로나게 마련이었다. 노나라에서는 주군의 사인이 늑골의 골절에 있음을 확인했고 그 범인이 팽생임을 알고 팽생의 처벌을 요구해왔다.
양공은 하는 수 없이 팽생에게 그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려야 했다. 이런 이면에는 관중과 포숙아의 지략이 숨어 있었으나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양공은 누이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머물게 하고 불륜의 관계를 계속했다. 사생활이 문란해지니 정치도 말이 아니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정사를 처리하니 법령이 설 리 없고 간사한 무리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저놈을 죽여라’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신하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규와 소백도 적이 근심이 되었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국사가 처리되는 상태에서 자신의 안전 문제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은 포숙아와 함께 거(莒)로 망명했고, 규는 노(魯)로 망명했다.
양공의 정치는 날이 갈수록 엉망이었다. 군주를 원망하는 신하들이 자꾸 늘어만 갔다.
양공을 가장 원망했던 사촌동생 무지는 비밀리에 양공의 반대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이때 양공은 노나라와의 국경을 수비하기 위하여 그 수비대장에 연칭, 관지보 두 사람을 채구(蔡丘)로 보내고 1년 교체를 약속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교체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이들 두 사람은 무지 등과 손을 잡고 반란을 꾀했다.
양공의 일거일동을 정보원을 통해 탐지하고 있던 이들 반란 음모자들은 양공의 정치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마침내 무지를 앞세워 궁중에 침입하여 다락방 속에 숨어 있던 양공을 죽이고 반란에 성공했다.
무지가 제나라의 군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지에게는 나라의 주인이 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는 양공처럼 기분 내키는 대로 정치를 하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고 원한을 많이 샀다. 마침내 주인이 된 지 수개월에 살해되니(기원전 685) 제나라에는 주인이 없게 된 것이다.
이 주인의 자리를 놓고 규와 소백 사이에 골육상쟁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규는 노나라에서 관중을 군사(軍師)로 삼아 귀국을 서둘렀고, 소백은 거에서 포숙아를 군사로 삼아 또한 제나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규의 휘하에는 그의 어머니의 친정인 노나라 군대가 예속되어 전력면에서 우세한 입장에 있었다. 반면 소백의 외가는 위(衛)나라인데 제나라와의 거리가 멀 뿐더러 군사력도 미약하여 노나라와는 비교도 안 될 약소국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규의 군사력이 훨씬 우세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됨됨이나 의욕면에서는 소백쪽이 강했다. 소백이 망명해 있는 거는 제나라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규가 아무리 밤을 낮삼아 귀국을 서둘러도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당도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는 것보다 더 환한 일이었다. 관중은 이 점을 헤아리고 있었다.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귀국하는 길 어느 곳엔가에서 매복해 있다가 소백을 죽일 작정이었다.
채찍을 더하여 쏜살같이 달려오는 소백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영락 없이 소백의 배에 명중했다. 소백의 허리띠 쇠고리에 탁하고 명중하는 순간 소백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떨어져버렸다. 멀리서 보기에 틀림없이 복부에 맞아 영영 죽은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관중은 ‘이제 됐다. 제나라는 규의 차지다.’생각하고 이 사실을 노나라에 보고했다. 규는 기뻤다. 제나라의 주인이 된 기분으로 느긋하게 제나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관중이 쏜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 쇠고리를 맞혔을 뿐 소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리띠 고리에 화살이 맞는 순간 소백은 기지를 발휘했다. 속임수로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척 가장했던 것이다. 관중도 소백의 기지에 넘어갔던 것이다.
죽음을 가장한 소백은 영구차에 실려 곧바로 제나라에 돌아와 제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소백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규의 군사가 느긋하게 제나라에 이르자 제나라 군사와 노나라 군사 사이에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 진격해오는 노나라 군사를 제나라 군사가 완전히 포위하니 승부는 완전히 결정나버린 것이다.
규는 죽임을 당하고 관중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이미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소백, 이 사람이 첫 번째 패자가 된 제나라 환공이다. 그는 자신의 제나라 귀국을 중도에서 방해하여 죽이려 했던 관중을 몹시 증오해 당장 처형할 작정이었다. 그러자 포숙아가 나서며 만류하였다.
“주군께서 오직 제나라만을 다스리시려 하신다면 이 포숙아 한 사람의 힘으로도 족할 것이오나 만약 천하의 패자가 되시려 하신다면 관중이 아니고서는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환공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중을 풀어주어라.”
관중은 등용되자 제나라의 정사를 맡게 되었다. 환공이 패자가 되어 제후들을 규합시키고 천하를 바로잡은 것은 다 관중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제나라 환공이 즉위한 것은 기원전 685년이다. 이후 환공이 즉위한 다음해 초(楚)나라는 채(蔡)나라를 공략하여 애공(哀公)을 포로로 하였다. 환공 즉위 4년 전 초나라는 신(申)을 정벌하였고, 2년 전에는 수(隨)를 정벌하니 중원의 제후들은 강대해지는 초나라의 북진이 두려워 강력한 맹주(盟主)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것이 환공이었다.
환공은 주변에 있는 나라들을 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환공에게 먹힌 나라의 수는 《한비자(韓非子)》에 의하면 30국, 《순자(荀子)》에 의하면 35국으로 되어 있으니 대단한 위력이었다.
환공이 맨 먼저 병탄한 나라는 담(郯, 譚)이라는 소국으로 산동성에 있었다. 이 나라는 환공이 일찍이 거(莒)로 망명할 때 통과한 나라로 환공이 그 나라를 통과할 때 매우 괄시를 당한 일이 있었다. 환공은 그 원한을 갚기 위해 담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노나라를 정벌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형 규에게 군대를 후원해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은혜는 은혜로 갚고 원수는 원수로 갚는다는 보복적인 사상이 강했던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노나라와의 싸움에서는 노나라 장수 조말(曺沫)이 거느린 노군을 세 번이나 무찔러 노나라 수읍(遂邑)의 땅을 받기로 하고 강화를 맺게 되었다.
환공과 노나라 장공(莊公)이 피를 마시며 맹약하려는 때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조말이 갑자기 단상에 뛰어올라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고 위협하였다. 환공의 좌우 신하들은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환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조말이 대답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오이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시오.”
환공은 어쩔 수 없이 빼앗은 땅을 도로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환공의 약속을 받은 조말은 비수를 던져버리고 단에서 내려와 원래 자리로 가서 서는데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아주 태연자약하였다.
협박에 의해 이루어진 약속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환공이 그 약속을 어기려고 하자 관중이 간하였다.
“안 됩니다.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신의를 저버린다면 천하의 원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약속한 대로 돌려주는 것이 참다운 이익을 얻는 일입니다.”
이에 환공은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니 조말이 세 번에 걸쳐서 잃었던 땅을 노나라는 모두 회복하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제후들에게 전해졌다. 협박에 의한 약속까지 지키려는 환공의 신뢰는 그를 천하의 패자로 만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땅은 얻지 못했지만 그보다 몇백 배 되는 값진 것을 얻게 된 것이다.
관중은 계속해서 부국강병책을 펴나갔다. 전국을 21향(鄕)으로 나누어 행정의 질서를 바로잡고 주나라 때부터 실시해오던 정전법(井田法)을 현실에 맞게 개편하여 생산의 증대를 기했고 새로운 군제(軍制)를 제정하였다.
제나라는 산동반도를 영유하고 있어 해산자원이 풍부하였다. 어업과 염업의 발달은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노예제 시대의 낡은 방법을 씻어버리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였다. 또 범죄자들에게는 무기나 철 등을 나라에 바치는 대가로 그 죄를 사하여 주는 등 제나라는 경제적·군사적으로 활기에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
북쪽 융적(戎狄)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져 자주 중원을 침공하더니 마침내 형(邢)을 공략하고 이어 위(衛)를 침공했다. 그때 위의 의공(懿公)은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학을 기르는 데 국고를 탕진할 정도였다. 국방보다도 학을 더 중요시하여 학에게 작위(爵位)를 줄 정도로 미쳐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군대도 등을 돌릴 지경이었다. 위나라 대신들까지도 “그렇게 학을 좋아했으니 학을 시켜 융적을 막게 하면 좋을 게 아니겠는가!”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위를 침공한 융적이 의공을 죽이자 위나라에서는 대공(戴公)을 세웠는데 대공은 그 해에 죽었다. 위나라는 환공의 외가 나라였다.
관중은 환공에게 아뢰어 왕실을 높이고 외적을 물리치자(尊王攘夷)는 슬로건을 내세워 주왕실을 지킨다는 기치를 높이 들어 융적을 몰아내고 형나라·위나라를 부흥시켰다. 이로써 환공은 제후의 지도자로서 맹주의 역할을 다하고 실질적인 패자가 되었다. 패자란 천자를 대신하여 천하의 일을 간섭·처리하는 사람이다.
환공은 패자로서 노나라의 내분을 다스렸다. 이것은 환공의 누이동생 애강(哀姜)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녀는 일찍이 노나라 장공에게 출가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한데다가 남편의 동생인 경보(慶父)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환공은 애강을 불러다가 죽이고 그 시체를 노나라에 돌려보냈다. 노나라의 내분 관계는 얽히고 설켜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애강은 노나라의 풍기를 문란시킨 음탕한 악녀라고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애강의 남편 장공의 어머니는 문강이었다. 그러니까 애강에게서 본다면 남편 장공은 언니의 아들이니 이질 조카와 결혼한 셈이다. 그런데다가 언니는 양공과 근친상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노나라 장공이 제나라 양공과 그의 누이 문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겠는가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애강도 물론 이러한 사정을 다 알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피와 피로 뒤섞인 남자를 남편으로 평생을 보내기보다는 아무리 남편의 동생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다른 경보쪽에 마음이 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환공에게는 애강을 죽일 자격이 없었다고 애강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환공이 제후들로부터 패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당시 초나라의 북진을 제지해야 한다는 제후들의 기대에 호응하여 초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출병한 때부터이다. 이때가 기원전 656년이고 누이동생 문강을 죽인 3년 후의 일이다.
제나라가 초나라를 공략할 때 내세운 구실은 첫째, 주왕실에 공납을 게을리한 것, 둘째 주나라 소왕(昭王)이 남쪽으로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죄를 문책한다는 내용이었다. 원래 초나라는 제사용 공물을 주왕실에 바치기로 되어 있었는데 초나라에서는 자칭 왕이라 일컫고 의식적으로 공물을 바치지 않았던 것이다.
제후들이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보이자 초나라에서도 연합군과 대항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강화를 제의했다. 결국 소릉(召陵)에서 강화를 맺게 되었는데 제나라 환공의 문책 조항에 대해 초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물을 게을리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과인의 죄입니다. 앞으로는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소왕이 돌아가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로선 까맣게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을 아시려거든 한수(漢水)에 물어보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매우 당당하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주나라 소왕의 일은 이미 300년 전의 일이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책임을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나라 소왕이 초나라의 조상에 해당하는 부족에게 죽임을 당하여 돌아오지 못했다는 서주 시대의 역사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제나라 환공 35년(기원전 651) 여름 제후들을 규구(葵丘)에 모아 회맹(會盟)하였다. 천자의 허락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관중의 권유에 따라 환공이 당에 내려가 천자에게 배례를 올림으로써 더욱 제후들의 신뢰를 받았으니 이때가 환공이 패자로서의 절정기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회맹에 대하여 알아보자.
회맹이란 제후 사이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것을 회의에 붙여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대로 시행할 것을 맹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규구의 회맹에서는 구체적인 문제는 없었고 주로 윤리적인 문제가 토의되었음을 우리는 《맹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맹자》에 의하면 규구의 회맹은 그 형식상으로 보아 지금까지의 회맹과는 많이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주례(周禮)》에는 회맹의 형식을 “소(희생)를 잡아 그 피를 마신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 반하여 《맹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패 중에서는 제나라 환공의 위세가 가장 강했다. 규구에서 제후들과 회합했을 때는 희생으로 바쳐진 소를 묶어 놓고 그 위에 맹약서를 올려 놓았을 뿐 소를 죽이고 피를 마시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맹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효한 자를 죽이고 세자를 바꾸지 말며 첩을 정실로 삼지 말 것.
둘째, 어진 자를 존중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기르며 덕있는 사람을 빛나게 할 것.
셋째, 노약자를 존경 애호하고 빈객과 여행자를 소홀히 대접하지 말 것.
넷째, 사(士)의 관직은 세습할 수 없으며 관직을 겸할 수 없다. 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적절한 인재를 쓸 것이며 대부를 함부로 죽이지 말 것.
다섯째, 제방은 구부러지게 쌓지 말고 이웃나라의 재황(災荒)을 구제하기 위해 양곡을 파는 것을 막지 말고 또 토지를 봉상(封賞)하면 반드시 고할 것.
그리고 부대 조건으로 ‘모든 우리 동맹인들은 동맹을 맺은 후에는 다 같이 우호 협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 규구의 회맹이 있던 바로 그 해 가을에도 제후들을 다시 규구에 모아 회맹을 가졌는데 이때 환공은 점점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환공의 교만이 비위에 거슬렸음인지 9개국 제후들이 불참하였다. 앞서의 회맹 때도 주나라 왕실에서는 사자를 보내왔는데 이번 회맹 때도 사자를 보내왔다. 이 사자가 개회식에만 참가했다가 바로 귀국길에 올랐는데 도중에서 진헌공(晋獻公)과 마주쳤다. 진헌공은 병으로 늦게 참석하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후 헌공이 물었다.
“아직 회맹이 끝나지 않았을 텐데 어인 일로 그렇게 빨리 돌아가십니까? 저는 몸이 불편하여 좀 늦게 가는 길이옵니다만.”
사자가 대답했다.
“환공은 요즘 매우 교만해졌더이다. 9개 나라 제후들이 불참했으니 헌공께서도 가실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헌공도 곧바로 발길을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9개국이나 불참한 회맹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불참했다는 구실로 환공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치겠다고 나설 염려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환공은 제후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었다.
환공은 이 규구의 회맹을 전성기로 재위 43년에 죽고 관중은 그보다 2년 전에 죽었다.
제나라 환공이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로서 그 위력을 떨친 것은 재상이었던 관중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문에 옛 사람들은 관중이 환공의 패업을 도와 천하를 통일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환공과 관중과의 관계는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을 만큼 긴밀하였다. 관중의 충언과 계책을 환공은 서슴없이 받아들여 협조 관계가 잘 이루어졌음을 다음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
어느 날 환공이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고 머리에 쓴 관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환공은 한 나라의 군주로서 또는 천하의 패자로서 위신을 잃은 것이 부끄러워 3일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질 못했다. 이에 관중은 “그런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로서 족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선정을 베푸시어 그 오명을 씻어버리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옳은 말씀이오.” 하고 환공은 그 날로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옥에 갇힌 죄수들의 죄를 다시 조사해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런 일이 3일간 계속되자 백성들은 기뻐 노래를 불렀다.
“제발 우리 주군께서 또 한 번 관을 잃어버리게 해주십시오.”
환공이 죽자 아침 해가 하늘에 떠오르듯 뻗어만 가던 제나라 세력도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내분에 휘말려 점점 그 세력을 잃어갔다.
환공이 죽기 1년 전에 적(狄)으로 망명해 있던 진(晋)의 공자 중이(重耳)가 제나라로 찾아왔다. 중이는 관중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제나라에는 인재가 필요할 것이니 혹시 등용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찾아왔던 것이다. 제나라에서는 이 망명 공자를 정중히 맞아들이고 제나라 공녀와 결혼시켜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진의 공자가 망명해온 것은 후계자 문제에 얽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국인 진나라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의 참상을 치가 떨리도록 보아 왔던 그가 제나라에 와서도 다시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권력 투쟁을 또 보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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