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공자와 제자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말의 내용, 즉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의미 파악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 얘기를 나누었는지 사회적 컨텍스트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논어》를 읽다 보면 수많은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때에는 자(字)로 불리고, 어떤 때에는 이름으로 불려 혼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논어》를 읽기 전에 공자 제자들의 이름과 자, 그들의 성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는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공자의 가르침을 받았던 가까운 제자는 약 7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제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안회(顔回)
자는 자연(子淵), 흔히 안연(顔淵)으로 불린다. 공자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로 주로 칭찬을 받을 때 등장한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몸이 약했던지 일찍 죽었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으며, 아버지 안로(顔路)도 공자에게 배웠다.
중유(仲由)
자는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라 하였다. 공자보다 9세 아래로 제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안회와 대조적으로 공자의 꾸중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그만큼 그에 대한 공자의 사랑과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매우 솔직하고 용기 있는 인물로, 공자는 늘 앞서는 행동을 하는 그를 염려하였다. 위나라 내전 때 자기가 모시던 사람을 구하고자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염구(冉求)
자는 자유(子有), 주로 염유(冉有)로 불렸다. 정치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행정과 군사 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계씨의 가신이 된 그가 계씨의 횡포를 막지 못한 데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능력이 있는데도 자기가 가르친 도를 현실 정치에 구현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 위나라 사람으로 외교 방면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제자 가운데 가장 부자였으며 실물경제에 대한 예측 능력도 뛰어났다. 공자 사후에 상례를 주재할 정도로 공자를 매우 따랐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다방면에 능한 그를 보고 공자보다 낫다고 이야기하자 그것을 강력히 부인하고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겸양할 정도로 중용의 덕도 갖추었다.
언언(言偃)
자는 자유(子游)이고, 노나라 오군(吳郡) 사람이다. 문학에 뛰어났지만, 예악(禮樂) 방면에도 식견이 깊었다. 20여 살에 벌써 노나라 무성읍의 책임자가 될 정도로 일찍 능력을 인정받았다.
복상(卜商)
자는 자하(子夏)이며, 공자의 제자 중 후배에 속하는 인물. 문학에 재능이 있었으며 성격은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춘추》 같은 경전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다. 공자가 가르친 유학의 전승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輿). 아버지 증석(曾皙)과 함께 공자에게 배웠는데, 그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효성이 뛰어난 인물로 《논어》에서는 주로 증자(曾子)로 불린다. 이는 아마 그의 문하생들이 《논어》의 편찬에 많이 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 말씀의 깊은 뜻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여 다른 문인들에게 설명하였으며, 가슴에 새길 만한 명언들을 많이 남겨 공자의 후배, 제자 중 가장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제자가 많았으며, 특히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전손사(顓孫師)
자는 자장(子張). 진(陳)나라 사람으로, 후기의 제자이다. 공자가 행동이 지나치다고 평할 정도로 매사에 의욕적인 인물로 보인다. 배우는 데도 열의가 있었고, 위급한 것을 보면 생명을 내걸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민손(閔損)
자는 자건(子騫), 흔히 민자건으로 불린다. 증삼과 함께 효성이 뛰어난 인물로 유명했고, 공자도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또한 권세 앞에도 굴하지 않는 의기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당시 권력자인 계씨(季氏)가 그에게 큰 벼슬을 주며 부르려 하자 단호히 거절할 정도로 깨끗하게 처신하였다.
재여(宰予)
자는 자아(子我)로, 말을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고 외교 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늘 말을 조심할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말 잘하는 재여는 자주 스승의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낮잠을 자다가 공자한테 혼나기도 하고 삼년상이 너무 길다고 했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공자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번드르르한 말과 논리를 늘 경계했던 것 같다.
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이며,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 아래였다. 구변은 없었지만 공자로부터 임금을 시킬 만하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어질고 덕망 있는 인물이었다.
유약(有若)
《논어》에서는 유자(有子)로도 칭해지는데, 그만큼 후대의 존경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의 모습은 공자와 매우 비슷하였다고 한다. 사회생활에서 있어 무엇보다도 윤리와 질서를 중시하였고, 백성으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염경(冉耕)
자는 백우(伯牛)로,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의 제자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덕행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악질에 걸려 고생하였고, 후대 문헌에서는 그가 문둥병에 걸린 게 아닌가 추측하였다. 그래서인지 공자도 그를 창 너머에서 문병하였던 것 같다.
담대멸명(澹臺滅明)
자는 자우(子羽). 자유의 참모로 활약했던 인물로, 공적인 일이 아니면 윗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을 정도로 공사(公私)의 구별이 분명하였으며, 늘 광명정대하여 지름길을 다니지 않았다 한다.
복부제(宓不齊)
자는 자천(子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공자로부터 참으로 군자답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원헌(原憲)
자는 자사(子思)로, 원사(原思)로도 불린다. 평소에 재물을 탐하지 않고 벼슬자리를 추구하지 않았던 청렴하고 소박한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공야장(公冶長)
자는 자장(子長)으로, 공자가 사위로 삼을 정도로 아꼈던 제자이다. 공자는 그를 스스로 절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남궁괄(南宮括)
자는 자용(子容). 정치는 군사력과 형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 해야 된다는 공자의 정치사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우(禹) 임금의 정치를 본받고자 했다. 또한 언행에도 신중하여 공자는 그를 조카사위로 삼았다.
증점(曾點)
자는 자석(子晳). 아들 증자와 함께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인물이다. 늦은 봄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조리며 산책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혀 공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유가사에서 존경을 받는다.
고시(高柴)
자는 자고(子羔). 공자로부터 우직하다는 평을 들었다.
칠조개(漆雕開)
자는 자약(子若). 공자가 벼슬을 주어도 사양할 만큼 겸손한 인물이었으며,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사마경(司馬耕)
자는 자우(子牛). 말이 많고 성질이 조급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번수(樊須)
자는 자지(子遲). 인(仁)보다는 지(知)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공자에게 물어보다가 공자로부터 소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매사에 빨리 성취하려고 하였다.
공서적(公西赤)
자는 자화(子華). 흔히 공서화(公西華)라 불렸다. 그의 집안은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였으며, 종묘 의식과 외국 손님을 모시는 예의범절에 밝았다.
무마시(巫馬施)
자는 자기[子旗(期)]. 그는 자기의 신념과 맡은 직분에 충실하였으며, 부귀를 탐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2,500년 전 공자가 현대인에게 전해 주는 새로운 메시지《논어》. 공자와 《논어》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마련하여 이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도모한 뒤, 《논어》 가운데 우리들의 삶을 여유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