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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0년 전쟁 발발
시대 | 근대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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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 후 독일 지역에서는 약 60년 동안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북부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프로테스탄트교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제는 전 독일을 다시 가톨릭화 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바이에른 공국도 자유의사에 의해서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바이에른 공국이 가톨릭을 선택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카를 5세처럼 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국의 제후로서 자유와 자치권을 다시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위협의 요소가 있음에도 17세기 초 동맹을 결성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가톨릭 제후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 동맹의 지도자로 칼뱅 교회 출신인 팔츠의 선제후가 선출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가톨릭 제후들은 동맹으로 리가(Ligar)를 결성하였다.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에 예속되어 오스트리아 황제의 명령을 받는 지역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들도 교회를 건립할 수가 있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예배당에 집기를 설치하고 있을 때 가톨릭 교도들은 황제의 칙허장 내용에 위반되는 사항이라고 항의하며 교회 집기들을 내던지고 문을 닫았다. 이에 격분한 프로테스탄트들은 황제에게 항의하며 황제를 밖으로 퇴장시켰다.
1618년에는 독일과 체코의 귀족들이 프라하 황제궁에 모였다. 체코의 귀족들이 흥분한 나머지 심한 욕설을 주고 받은 세 명의 독일 귀족들을 왕궁의 창문에서 던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보헤미아의 소요 사태로 비화되었고, 30년 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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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대학에서 독일 현대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단국대학교와 경기대학교에 출강하였다. 공저로는 <유럽연합 체제의 이..
출처
독일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부족 국가의 시기를 거쳐 근대국가 체제로 성장하면서 유럽에서 입지를 강화해간다. 게르만 민족에서 독일의 통일까지, 역동적인 독일사의 현장속으로!